Contents

  1. 역사

1.1. 왕정 시기

1.2. 공화정 시기

1.3. 마리우스의 개혁, 그리고 내전기

1.4. 아우구스투스의 재편

  1. 조직(공화정 말기에서 원수정 시기)

2.1. 프라이토리아니

2.2. 레기온

2.2.1. 군단 일람

2.2.1.1. 공화정 후기

2.2.1.2. 제정시기

2.3. 켄투리오

2.4. 병과

  1. 로마군인의 생활

3.1. 군법과 형벌

  1. 후기 로마군

Exercitus Romanorum. 고대 로마, 다시 말해 로마 공화정 및 로마 제국군대이다.

1. 역사 ¶



1.1. 왕정 시기 ¶

초기의 로마군은 부족 단위로 구성된 집단을 이 이끄는 식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정식으로 병력을 징병하는 식으로 제도를 개혁하여 이것이 정착된다.

기원전 500년 이전까진 대략 9,000명 정도를 징병했는데 6,000명 정도는 중보병이고 2,400명은 경보병, 그리고 600명은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왕이 두 명의 집정관으로 바뀌면서 이 9,000명은 두 집정관이 나눠서 지휘하게 되었는데 따라서 각각 4,500명씩 지휘하게 된다.

소규모 국가답게 당시 잘 나가던 에트루리아그리스를 적극적으로 모방했으며 에트루리아에게 패배한 이후에는 밀집대형 전법을 익히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의 팔랑크스와는 달리 로마는 백인대를 구성하는데 이는 소규모 부대로 주변 도시들을 약탈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대다수의 군인들이 농경기엔 농사를 지었었는데 이는 곧 상비군은 많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덕택에 원정 전쟁에선 약한 모습을 종종 보였는데, 큰 문제가 안 되었던 것이 당시 '로마'는 현재의 로마시보다 작았기에 방어적 전투 혹은 로마 주변에서 전쟁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용하던 장비는 에트루리아군이나 그리스군과 큰 차이가 없었으리라 추정된다.

자세히 알기 힘든 것이 로마군의 아무리 예전 모습을 추정하더라도 공화정 시기 정도이기 때문에 왕정 시기의 로마군에 대해선 자세히 알기 힘들다. 일단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고, 그나마 남아있는 사료 등도 믿기 힘든게 많아서 제대로 조사히기 힘들다.

1.2. 공화정 시기 ¶

공화정 시기의 로마군은 징병된 시민을 중심으로 조직된 시민군이었다. 자영농으로 구성된 시민들은 무장을 개인적으로 조달했으며, 따라서 재산에 따라 무장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고 군에 있어서 차지하는 역할도 달라졌다. 사회적 계급이 곧 군의 계급이 된 셈이다. 시민들은 재산 액수에 의해 분류되어 최상위 계층은 기병과 중장보병을, 중위 계층은 중장보병을, 하위 계층은 경장보병을 맡는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이렇게 재산별로 나뉜 병사들은 백인대장이 이끄는 백인대에 소속되며 이들은 각각 작은 정사각형들을 구성하며 하나의 커다란 직사각형을 이루었다. 또한 무장의 질과 나이에 따라 이들은 벨리테스,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 에퀴티로 나뉘었는데, 벨리테스는 투창병, 하스타티는 경보병, 프린키페스는 중보병, 트리아리는 중창병, 그리고 에퀴티는 기병이었다.

벨리테스는 매우 가볍게 무장하였으며 많은 수의 투창을 들고 다니며 전투 개시시 최전방에서 투창을 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스타티는 젊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경보병으로 전선의 맨 앞줄에 위치하여 적의 체력을 소모하는 역할을 맡았다. 프린키페스는 로마군의 핵심이자 주력을 이루는 병력으로 이들은 젊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30대에서 40대 초반의 시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트리아리는 나이가 많은 고참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은 최후방에 위치하며 여러가지 전술적 움직임에 동원되거나 불리한 전선에 투입되는 등의 보조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시스템은 매니풀라(manipular) 시스템이라 불리우며 이러한 조합은 삼니움 전쟁때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로마 고유의 독특한 구성은 로마군으로 하여금 다른 세력에는 볼 수 없는 상당한 유기적인 움직임을 가능케 하였으며 따라서 로마군은 다양한 전술적인 움직임이 가능하였다. 그 결과 로마군은 전투에서 패배하는 일이 적었으며 특히 평야에서 맡붙는 회전에서는 무적에 가까웠다.

또한 로마군은 그들과 같은 라틴족 도시들로 이루어진 라틴동맹의 동맹시 또는 속국들에게서 보조병을 징집하여 동원한다. 옥질리아(Auxilia)라는 이 보조병의 개념 역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로마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이는 로마 군단과 거의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동맹시로부터 제공받아 로마군과 같이 싸우는 것이었다. 로마는 보조병을 제공받는 대가로 자신들의 동맹시들에게는 외교권을 제외한 것을 빼고는 완전한 정치적인 자치를 부여하였으며, 세금 역시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는 그들에게 군사적인 보호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보조병의 존재는 로마의 군비를 크게 절감시켰고, 군사력 또한 크게 상승하게 했다. 그 결과 그리스의 아테네나 테베와 같은 그리스의 대도시에 비해 로마가 해마다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양은 상당하였다. 따라서 로마는 대규모의 총력전이 가능하였으며 포에니 전쟁때는 해마다 10만이 넘는 병력을 편성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에피루스의 피로스왕은 로마를 히드라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침입함으로써 발발한 2차 포에니 전쟁때 로마인들은 한니발로 부터 기병 운용의 중요성을 터득한다. 한니발은 우세한 기병 전력을 바탕으로 이들이 빠른 기동력으로 보병 배후로 기동한 뒤 돌진함으로 충격을 주는 전술을 즐겨 사용했고 이는 로마군이 초기에 연전연패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전술에 연패하고 또 칸나이전투에서 사상 최악의 패배를 경험한 로마인들은 기병 전력의 확보에 열을 올리게 되었으나 기존의 귀족으로부터 기병전력을 조달하는 방식으로는 충분한 전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지형은 대부분이 산지라서 말을 키울 목초지가 부족해서 말을 많이 키울 여건이 안되었다. 때문에 로마인들은 기병부대를 대거 운용하는 이민족 부대 전체를 고용하는 방식으로 기병 전력을 조달하고 더이상 귀족으로 부터 기병을 조달하지 않는다. 그 결과 Equity는 더이상 기사가 아닌 계급을 뜻하는 명칭으로 굳어지게 된다.

이러한 방식의 기병 조달은 훗날 제국 후기에 보이는 로마군의 이민족화의 불씨가 된다는 게 일반적인 통설이다. 단, 이 말은 더 깊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제국 후기에 접어들어 기병의 중요성은 점점 높아지지만 적어도 3세기까진 이들은 말만 기병이지 상당수는 하마 보병이었으며 4세기 때는 이런 서술이 확실히 들어맞는 시기긴 하나 여전히 제국은 보병을 기병보다 훨씬 더 많이 운용했고 야만족 부족 단위 계약 용병들인 포이데라티들은 여전히 제국 정규병들의 존재 탓에 행동을 제약당했다. 또한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전까지 포에데라티들은 개인별 혹은 소규모 그룹 단위로 로마군에 입대했으며, 대규모 이민족 집단이 로마로 귀순해오면 제국 전역으로 분산시켜 이들이 힘을 결집하는 것을 막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향인 다뉴브강 연안에서 멀고도 먼 하드리아누스 방벽 인근에 배치된 사르마티아 기병들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로마군 최악의 암흑기는 5세기의 이미지인데 대부분의 책들은 2~5세기에서 이어지는 경과들을 단 몇 줄로 축약하는 탓에 이런 오해가 생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전히 주의는 필요하다.

또 로마인들은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밀집상태에 빠져 전멸한 것을 교훈으로 기존의 매니풀라 방식의 전투를 개혁하였다. 로마인들은 백인대들을 따로 모아 정사각형 형태를 이루게 한 뒤 이를 한명의 지휘관이 지휘하도록 하였으며 이는 훗날 마리우스가 코호르스(일명 대대)라 명명함으로써 공식화 된다.

이 코호르스의 편성으로 인해 칸나이 전투와 같이 밀집되는 상황이 되면 대대장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배후로 방향을 틀거나 전열에서 이탈하여 협공에 대비하는 식의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하여 밀집 포위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게 되었다.

이처럼 시대에 맞는 개혁과 기병의 운용으로 인해 로마군은 더 강해졌으나 로마의 전장이 확대되면서 자영농인 시민들에게 군복무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장기간의 해외원정으로 농장이 황폐화 되고, 전쟁의 결과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시민이 많아졌던 것이다. 그로 인해 군대에 투입되는 인적자원도 고갈되어 갔다. 때문에 점차 징병을 위한 최소 자산 수준을 낮추는 조치가 있었다. 그러나 로마 역사상 최대의 위기였다고 할 수 있을 한니발바르카와의 전쟁 중에도 무산자는 소집되지 않았던 이유를 무시한 결과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당장 자산이 낮은 로마시민들의 군대는 무장 수준이 떨어지고, 무산자들은 체력적인 면에서도 빈약한데다가 무장도 제대로 못갖추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로마군의 전체적인 질적 저하를 초래하였다.

보조병을 담당했던 로마의 동맹시들도 점점 상황이 안좋아졌다. 원래 초창기에는 로마가 동맹시들에게 위에 언급한 것처럼 외교권을 로마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고는 완전한 정치적 자치를 보장하고, 군사적인 보호를 제공했지만 나중에 가면 갈수록 동맹시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으며 세금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또한 동맹시의 자치권이 보장된다해도 동맹시의 시민들은 준로마 시민이지 정식 로마 시민이 아니라서 여전히 차별했다. 그래서 이에 분노한 동맹시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따라서 공화정 말기때 로마군은 총체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벌어진 누만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대패하였고, 킴브리족과 튜트네스 족의 남하를 저지하려 보내진 두명의 집정관은 목숨을 잃고 아루시오에서는 80,000명의 로마군이 전멸당하였으며 또한 유그르타 전쟁에서는 계속 고전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때 등장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또다시 시대에 맞는 개혁을 함으로써 로마 공화국을 위기에서 구한다.

1.3. 마리우스의 개혁, 그리고 내전기 ¶

마리우스의 집권 이전 시민군의 의무를 지는 자영농을 바탕으로 하던 로마군은 자영농의 몰락으로 인해 인적자원이 고갈되며 전투력이 저하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마리우스가 군제 개편을 하기 전 로마군은 야만족의 대대적인 침공에 처참하게 무너지기까지 했다. 지중해의 패권국의 군대가 붕괴되는 것은 패권의 연쇄적인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로마에게는 희대의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집정관에 선출된 마리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제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는 재산에 따라 징집하던 관례를 없애고, 무산계급까지 모병하는 대신에 그에 대한 임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방식대로 재편된 로마군은 거짓말처럼 야만족을 완벽하게 격파했다. 물론 마리우스 본인의 군사적 역량이 우수했던 것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이 개혁으로 인적자원 고갈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상설 군단이라보다는 일종의 계약직으로 운영된 것이 이 시기 로마군의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병역 기간이 정해진 것이 아니고, 때에 따라 봉급을 지불하는 군대를 모집하고 필요가 없으면 군대를 해산하는 식이었던 당시 로마군은 이전과는 달리 국가가 아닌, 전리품을 배분해 주거나 돈을 더 많이 주는 군사령관에게 충성하는 사병이나 용병처럼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무산자들로 이루어진 로마 군단병들은 정치에 소외된 계급이었다. 고대 로마의 정치제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로마의 관료를 뽑는 백인대 집회에서 무산자 계급은 사실상 투표권이 아예 없었다. 재산이 없는 계급에 해당되는 무산자 계급은 천명이건 만명이건 그 그룹 전체가 192표 중 1표만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한표가 영향을 준적은 로마 사상 한번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의 선거제도는 투표를 진행하면서 192표 중 과반수가 된 시점에서 투표를 중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무산자는 투표권을 가장 마지막에 행사하였고 따라서 이들이 발언권을 보이기 전에 이미 선거가 끝나게 되었다. 그 결과 무산자는 백인대 선거 자체에 구경하는 목적 이외엔 참여의 의미가 없었고 따라서 이들은 공화정 정치가들의 선거 운동 대상이 아니었다. 덕분에 누구도 이들을 제대로 생각해주지도 않으므로 전리품이나 봉급으로 아무리 돈을 모은다고 해도 한도가 있었다. 전쟁은 자주 일어나는 편이었지만 충분하지 않았고, 병사로 일할 수 있는 것은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군대를 이용한 실업자 흡수는 결국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했으며 자칫 현대 제3세계 군대 대다수처럼 사회의 쓰레기장으로 전락할 우려도 있었다.

이 때 군사령관들은 휘하의 퇴역병들의 복지를 보장해 줌으로써 지원병의 자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일단 상당한 경제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 함께 싸우면서 지휘관과 병사들 사이에서는 '전우'라는 인간적인 유대감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례는 내전기의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차후 원로원 의원으로서 정계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군사령관들은 잠재적으로 자신의 열렬한 지지자가 될 수 있는 퇴역병들의 생계를 보장해서 지속적인 지지 세력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루쿨루스처럼 그냥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여 적은 봉급만 주었을 뿐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주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루쿨루스는 그 때문에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직전까지 간 상태에서 병사들의 반항과 파업으로 폼페이우스에게 전공을 빼앗기고 차후의 정치적 입지도 불안해지는 등의 대가를 치렀으므로 야심있는 군사령관치고 자신의 부하들을 어느 정도 챙겨주지 않은 사람은 없다시피했다.

따라서 군사 지휘관들은 퇴역한 병사들의 생계 대책을 위해 정착지와 식민지를 달라고 요구하기 일수였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러한 요구에는 대체로 무감각 하거나, 뭉기적 거리며 제대로 처리해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원로원의 지배적인 파트리아키 파벌에서는 하층민으로 구성된 군대 역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불평쟁이 무산자 집단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이제 어느 사회에나 있는 무능력한 불평쟁이 무산자 집단이 아니었다.

과거의 개혁자 그라쿠스형제는 단지 한 줌의 지지자와 무력하고 조직되지 못한 무산 대중 군중 밖에 없었기 때문에 원로원에게 허무하게 참살되었다. 그런데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때문에 이 모든 조건이 뒤집어져 버렸다. 과거 '재산순'으로 유산 계급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처럼 담당하던 로마의 군사력이 이제는 무산자들이 담당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이제 노련한 전사였으며 칼을 가지고 있었다. 더 이상 무질서한 대중의 무리가 아니라, 당대 최고의 조직체인 로마 군대라는 체계를 통해 수천 수만이 조직화 되어 있었다. 또한 로마의 전쟁을 수행함으로서 자신들은 엄연한 로마 제국의 일원이고 제국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자부심까지 있었다. 물론 군사적 능력만 존재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군단 사령관은 정치-군사 모든 면에서 유능한 인물들이었고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인간적으로도 유대감이 깊은 정계 유력자가 자동으로 그들의 지휘관이자 대표자가 될 수 있었다.

빈털터리 무산자 계급으로 시작하여 타국을 약탈하거나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 인생을 바꾸는 재미를 안 병사들의 눈앞에는 훨씬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들어왔다. 바로 지중해의 모든 재물이 모여든 조국 로마였다. 야심많은 군사령관들은 이런 보상 심리를 이용하여 로마군이 조국을 향해 칼을 휘두를 수 있도록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외세의 힘을 빌리는 매국행위도 아니고 어차피 내부 정치 다툼이었으니 더욱 그렇다. 군단 병사들은 야심 많고 능력도 좋은 군단 사령관들의 의중에 쉽게 동조하였다.

이리하여 군사력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가 연속으로 벌어졌으며, 이 최초의 쿠데타인 술라의 로마 진군은 고작 마리우스가 군제 개혁을 단행한 뒤 10여년 뒤에 일어나게 되었다. 술라 이후에도 많은 장군들이 쿠데타를 시도하였고 그들 중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장군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wiki /%EC%9C%A8%EB%A6%AC%EC%9A%B0%EC%8A%A4%20%EC%B9%B4%EC%9D%B4%EC%82%AC%EB%A5%B4)와 폼페이우스,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들이었고 이들은 서로 내전을 벌이는 형태로 권력 다툼을 하였다. 결국 이러한 내전이 지속되었고 옥타비아누스가 이러한 정국 불안정을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공화정 체제를 무너뜨리는 대신 자신이 직접 통치에 나섬으로써 공화정은 종언을 고하게 된다.

1.4. 아우구스투스의 재편 ¶

혼란을 종식시킨 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는 항복한 병력까지 합쳐 60개 군단, 50만에 가까운 병력을 보유한 명실상부한 최고사령관이었으나 그 병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아우구스투스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군대는 본질적으로 경제력을 소모하는 비생산적 집단이며, 당시의 로마의 경제력을 생각하면 적절한 수준을 크게 초과하는 병력규모였기 때문이다. [1] 그래서 늘어난 병력을 28개 군단 17만 명까지 감축했다가 너무 부족하다 싶자 보조병을 포함해 30만 명 정도로 늘렸다. 이후 [토이토부르크 전투](/wi ki/%ED%86%A0%EC%9D%B4%ED%86%A0%EB%B6%80%EB%A5%B4%ED%81%AC%20%EC%A0%84%ED%88%AC )에서 3개 군단이 전멸하며 25개 군단으로 줄어들었는데 방어선이 그럭저럭 갖춰지면서 굳이 보충할 필요가 없다 싶었는지 그대로 내버려뒀고,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부터 브리타니아 원정을 하면서 군단이 다시 증원되어 오현제 시대 직전 28개 군단, 오현제 시대에 30개 군단,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때 33개 군단으로 증원되었다.

한편 사령관의 개인적인 군단 모집과 사령관이 병사들에게 사적으로 포상하는 것을 금지하여 군벌화를 막았다. 심지어 사령관이 휘하 병사들을 부르는 호칭마저 변화시켰다. 본래 사령관은 휘하 병사를 전우라는 의미를 가진 '콤밀리테스'라고 불렀는데, 이를 단순한 휘하의 병사라는 의미인 '밀리테스'로 부르도록 시켰다.

로마 병사들의 갑옷도 이 시기에 사슬 갑옷의 일종인 로리카 하마타(Lorica Hamata)에서 하프 플레이트 갑옷 종류인 로리카 세그멘타타(Lorica Segmentata)로 서서히 대체되기 시작한다. 흔히 로마의 병사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이 시기에 정립되었다. 다만 로리카 하마타 역시 꾸준하게 같이 사용되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가 철저하게 방어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으며, 재위 중기에는 양자인 티베리우스드루수스 형제를 등용하여 라인강 너머 엘베 강까지의 제패를 통해 게르마니아를 제국의 영역 내에 확보하겠다는 야망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에게 바루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전멸당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멈추게 되었고, 제위를 물려받은 티베리우스는 제국의 방어선을 라인 강으로 한정하며 게르마니아 제패를 포기했다.

결국 로마군은 아우구스투스가 게르마니아 제패를 포기한 이래 사실상 국경 방어군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전성기 로마의 국경선은 1만 킬로미터에 달하기 때문에 국경을 방어하는 것 자체가 절대로 만만한 임무가 아니었다. 실제로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황제들이 새로 속주로 삼은 곳은 기껏해야 브리타니아와 다키아에 불과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로마군이 철저하게 요새화된 국경선에 틀어박혀 수비만 한 것은 아니다. 로마군은 맞기 전에 먼저 때린다는 교리에 충실했으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야만족을 먼저 타격해 쓸어버리는 작업을 통해 국경을 방어했다. 물론 파르티아가 버티고 있던 동방 국경에서는 이런 방식을 시행하지 않았다. 파르티아가 강력한 적인 동시에 중요한 무역 상대이기에 그대로 국경 방어에만 전념. 기본적으로 열린 국경 시스템에, 전쟁이 나면 국경을 닫는 스타일이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산왕조 출현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문제는 이 씨앗을 로마가 뿌렸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니시비스전투 항목을 참고하라.

제정 시대 로마 제국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국경은 라인 강도나우강, 그리고 유프라테스강이었다(물론 유프라테스 '강 자체'가 국경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지만). 로마 제국은 이 세 국경선에 군사력의 핵심인 다수의 군단을 배치했다. 그리고 거의 군단병의 수에 준하는 정도의 보조병이 1차 방어선을 맡은 전력이었다. 보조병들은 주로 현지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반적인 전투 상황일 때는 보조병 선에서 대부분의 처리를 했고 대신 전면전은 군단이 수행했다. 그리고 제대할 경우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다수의 병력을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로마식 가도망과 곳곳에 들어선 초소와 요새가 결합된 유기적인 시스템은 제정 건설 이후 2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제국에 평화를 제공했다.

2. 조직(공화정 말기에서 원수정 시기) ¶

2.1. 프라이토리아니

Praetoriaeni. 일명 근위대. 아우구스투스가 이탈리아에 주둔하게 한 황제 직속 친위대.

정규 군단의 편제와는 거리가 있기에 '군단'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좀 있다. 정규 로마군이 10개의 코호르트 총 6천여 명으로 구성된 반면, 근위대는 총 9개 코호르트 9천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비텔리우스는 한때 9천명 규모의 근위대를 2배 가까이 증설했지만 베스파시아누스가 바로 원상복귀시켰다. 이후 세베루스가 근위대의 규모를 크게 보강하고(《로마제국 쇠망사》에는 거의 3배~4배 규모라고 쓰여 있다) 권한을 강화하면서 권력투쟁의 온상이 된다.

처음에는 원로원 등 공화제 세력들의 반발을 우려해서였는지 이탈리아 전역에 분산시켜 특별한 주둔지가 없었으나, 티베리우스 시절에 수도 로마 외곽에 근위대 병영을 짓고 전체를 로마에 주둔시키게 된다. 그리고 제국 후기에는 근위대 병영이 아우렐리아누스가 건설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일부에 포함되어 수도 로마의 방어 시스템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이탈리아에 주둔하는 사실상 유일한 군사력이었으나, 이러한 역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재위 당시 도나우 강 방어선이 돌파당하면서 맞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편성한 이탈리아 주둔군에 의해 끝나게 되었다.

황제 직속의 부대이니만큼 정예부대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황제가 직접 전선에 나가는 일이 드물어진 제정 중후반기에는 그저 가장 대우가 좋고 폼나는 병력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당장 근위대 병사의 급료는 675데나리우스로 일반 로마군 병사의 3배 가량이었다. 다만 중요한 전투에서는 직접 최전선에 나가서 싸우기도 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도미티아누스 시절에는 근위대 절반이 다키아와 싸우다가 궤멸당했던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들의 임무는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수도인 로마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경찰에 가깝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수도 경찰이 존재하는 로마의 시스템을 생각할 때, 치안 유지보다는 원로원에 대한 일종의 위협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제정 중기까지도 황제와 원로원은 서로 으르렁거릴 수 있는 관계였다.

이런 원로원을 제압하는 황제의 두 가지 무기가 바로 근위대와 국가반역죄였다. 근위대에는 두명의 근위대장이 있었고, 이들은 보통 원로원 계급이 아닌 기사 계급 출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근위대의 역할에 원로원 견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칼리굴라가 암살된 직후에 근위대는 원로원이 '공화정 복귀'를 선언할까봐 재빨리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앉혀 대응한다.

여러모로 '로마 제국 시스템의 대표적인 폐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이다. 수도 로마에 주둔하는 유일한 군사력이었던 탓에, 황제의 견제가 없을 경우 근위대장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국 후반으로 가면 근위대가 차츰차츰 정부의 다른 부서들을 흡수해, 근위대장이 재상 비슷한 위치까지 격상되게 된다. 황제조차도 근위대를 무시할 수가 없어서, 근위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주 근위대에 상여금을 내려주었다. 특히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인해 기반이 약한 황제는 더더욱 근위대에 매달렸다.

로마 역사에서 황실 내부의 권력투쟁은 흔했으며, 근위대는 보통 그 중심에 있었다. 근위대가 부각되면 로마가 혼란스러워졌고, 근위대가 조용하면 로마는 안정되었다. 실제로 오현제 시대에는 근위대에서 인기가 높았던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고 네르바가 제위에 앉자, 불만을 품은 근위대원들이 네르바를 유폐시키고 후계자를 빨리 선정하도록 윽박지르는 사건이 일어난 초기를 제외하면 근위대가 문제를 일으킨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오현제 시대가 끝나자마자 근위대는 다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제국 초기 티베리우스의 오른팔이었던 근위대장 세야누스는 황제가 로마에 없을 때 대리인 역할을 맡아 티베리우스를 대신해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다가 황제에게 숙청당했다. 숙청당할 당시에는 반역을 꾀했던 흔적도 있었다.

칼리굴라는 근위대 대대장이었던 카시우스 카이레아의 손에 암살당했고, 이후 근위대는 주도적으로 움직여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옹립한다.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에 상여금을 내려준다. 다만 이 때까지는 근위대가 집단적으로 '권력'을 차지하려 움직였다는 증거는 없으며, 카이레아는 클라우디우스가 자리를 잡자마자 황제 살해죄로 처형당한다.

네로 시절부터, 근위대가 정치에 개입하는 나쁜 선례를 만들기 시작한다. 클라우디우스 시절 아그리피나는 자기 아들 네로를 황제로 앉히기 위해, 심복인 브루스를 근위대장에 앉힌다. 클라우디우스가 급서하자(아그리피나가 독살했으리라는 설이 유력하다) 브루스는 근위대를 움직여 재빨리 클라우디우스의 아들도 아니었던 네로를 황제에 앉힌다. 근위대에 상여금이 내려졌음은 물론이다.

네로가 죽고 갈바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갈바는 오토에 의해 매수당한 근위대원들에게 살해당한다. 비텔리우스의 반란이 성공해 오토가 죽자, 비텔리우스는 자기 휘하의 '라인 군단' 병사들을 근위대로 이동시킨다. 물론 오토에 붙었던 전(前) 근위대원들은 모조리 축출당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비텔리우스에 반대해 들고 일어나자, 오토파 전(前) 근위대원들이 재빨리 베스파시아누스 편을 들고 비텔리우스파 현(現) 근위대원들과 맞서 싸우는 촌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집권하고 나서 아들이자 차기 황제인 티투스를 근위대장에 앉혀 새 왕조를 안정시키려 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이자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는 황궁 내 음모에 의해 암살당하고, 원로원에 의해 네르바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 근위대 내에서 인기가 높았던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한 데 불만을 품고 근위대가 네르바에 반대해서 들고 일어나는데, 네르바는 원로원의 뜻과 다르게 주도적으로 고지 게르마니아 사령관인 트라야누스를 차기 황제로 선임해 재빨리 근위대의 반발을 무마시킨다. '신의 한 수'라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오현제 시대에는 앞서 말했듯이 초기의 사건을 제외하면 근위대가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은 콤모두스는 궁정 내 음모에 의해 암살당하는데, 근위대장인 레토가 당시 인망있던 페르티낙스를 황제 자리에 앉힌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처럼 보였으나, 레토는 페르티낙스가 자신을 이집트 장관에 앉히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페르티낙스를 살해해버린다.
당시 레토는 사실상 페르티낙스를 제위에 앉힌 최고의 공로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티낙스가 자신에게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을 가질 이유는 충분했다. 이집트는 고대에는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었고, 다른 속주들과는 달리 황제의 사유지였기 때문에 황제만 눈감아 준다면 한 재산 모을 수 있는 곳이었다. 때문에 이집트 장관은 제국의 관료들이 선망하는 자리였다. 로마 제국에는 공식적인 관료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관료 계통은 분명히 존재했다. 원로원 계층에 속하지 않는 '기사 계급'이 보통 임명되었으며, 황제 재무관, 황제 비서[2] 근위대장, 이집트 장관 등 황제와 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근위대는 이후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이는데, 로마 황제 자리를 경매에 부친 것이다. 술피키아누스와 율리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놓고 경매를 하게 되고, 더 높은 값을 써낸 율리아누스가 제위를 '낙찰'받아 황제 자리에 오른다. 물론 돈으로 산 황제 자리가 당연히 안전할 리가 없어서, 도나우 군단을 이끌고 세베루스가 진군해오자 율리아누스는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살해당한다.
세베루스는 이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인 근위대를 해산시키고 근위대를 전부 자기 병사들로 채워넣는다. 그러면서 근위대의 규모를 3~4배 늘려 말 그대로 '군사 독재'를 펴게 되고, 이 때부터 로마 제국의 군사국가화가 가속된다.

이후로 로마 제국이 위로는 게르만족, 옆으로는 사산왕조에 압박당하는 시기인 이른바 군인 황제시대가 닥쳐오고, 이 와중에 황제를 살해하고 '근위대장'들이 그 뒤를 잇는 이들이 생긴다. 카라칼라의 근위대장이었던 마크리누스라든가, 고르디아누스 3세의 뒤를 이은 필리푸스 같은. 아우구스투스 이후 근위대가 해체되는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까지 52 명의 황제중 12 명이 근위대에게 살해당했다.

285년 이후 황제가 로마를 떠나게 되면서, 근위대는 버림받고 하는 일 없는 신세가 된다. 결국 근위대는 각종 음모와 내전에 개입하면서 한 몫을 챙겼던 기억을 잊지 못하고 막센티우스를 황제로 옹립하지만 막센티우스가 콘스탄티누스와 벌인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멸했고, 이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된다.

2.2. 레기온

Legion. 한국과 일본에서는 군단이라고 자주 불린다.

로마군 전력의 핵심 조직이다. 그러나 공화정 시기의 군단과 제정 시기의 군단은 편제가 꽤 다르다.

우선 공화정 시기 로마 군단은 고대 로마의 명장 카밀루스에 의해 체계가 갖추어졌고, 제정 시기보다 규모 면에서 비교적 작았다. 군단의 주력은 3개로 나뉘어진 중장보병 부대였다. 중장보병들은 군사 경력이 짧지만 젊은 축에 속하는 하스타티와 경험을 갖춘 실질적인 주력 부대 프린키페스, 나이가 비교적 많은 고참으로 구성된 예비대 트리아리로 나뉘어 편성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기병과 경장보병, 그리고 다수의 지원병과가 존재했다.

제정 시기의 군단은 기본적으로 마리우스에 의해 짜여진 편제를 기본으로 한다. 각 6개의 켄투리아(가장 비슷한 현대 군 편제는 중대 정도)로 구성된 총 10개의 코호르스(현대의 강화된 대대 정도?)가 1개 군단, 즉 레기오를 형성한다. 마리우스의 개혁 이래 로마는 2개 군단을 집정관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전략 단위의 병력으로 취급했다. 주력은 여전히 시민으로 구성된 중장보병이었지만, 규모의 확대 및 보조병의 충원을 통해 유기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기병이 부족하다는 점은 항상 로마군의 아킬레스 건이었다. 기병을 제공하던 최상위 계층의 수는 적었고, 당시에는 등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병을 육성하는 것은 로마에게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또한 군마부족도 정말 심각했다. 로마군에서 군마를 탈수있는게 고위장교, 연락병뿐이었다. 이러다보니 로마군은 항상 보병 중심일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로마군은 동맹국 및 속주에서 기병을 충원받았는데, 사실상 충원이 아니라 비싼 돈주고 용병처럼 고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대표적인 예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명한 갈리아/게르만 기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맹자였던 누미디아 기병을 들 수 있다.[3] 물론 기병은 돈이 워낙 많이 드는 관계로 이들조차 기병이 강한 페르시아나 파르티아에 비하면 높은 비율은 아니었다. 후기로 가면 로마 황제들이 기병의 비율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는데 문제는 이때 로마의 경제가 파탄난 막장상황인지라 이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공화정일때 로마군에서 집정관 군단의 경우 대대장은 모두 시민들에 선거로 선출된 군사호민관(military tribune)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기껏해야 20대 초반의 젊은이들로 명예로운 경력에 처음 나선 유망주들이었다. 군단장은 집정관이 부관으로 데려온 노련한 정치가들 중 하나로 임명하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군단장 부재시 군단을 맡은 제1대대장도 이러한 군사호민관으로 선출된 이라 비록 미래의 엘리트라지만 애송이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이라는 칭호를 받는 명예로운 자리인 1대대장의 중요성을 감안했을 때 얼핏 이러한 시스템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군사 경력과 민간 경력을 조화롭게 쌓아나가는 것을 중시했던 전성기 로마 엘리트들의 사고방식을 감안하면 중요한 군사 의무의 수행 경험을 이런 애송이가 맡는 것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들이 애송이에 불과하다지만 군사호민관에 나서 당선되는 것도 매우 경쟁이 치열한데다 시민들이 아무나 뽑아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기본적인 군사 지식을 빡세게 교육받으며 이 선거에 대비해 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능력은 갖고 있었다.[4]

2.2.1. 군단 일람 ¶

2.2.1.1. 공화정 후기 ¶

단대호

상징물

군단 주둔지

비고

제1게르마니카 군단

제2사비나 군단

제2아우구스타 군단으로 명칭 변경

제3키레나이카 군단

제3갈리카 군단

황소

제4마케도니카 군단

제4스키티카 군단

제5알라우다에 군단

제6페라타 군단

늑대[5]

제7클라우디아 피아 피델리스 군단

제8아우구스타 군단

황소

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존속

제9히스파나 군단

황소

108년 브리타니아에서 실종

제10프레텐시스 군단

일명 카이사르 군단

제11군단

넵튠

제12빅트릭스 군단

제13게미나 군단

사자

카이사르가 로마 진군때 지휘

제18리비카 군단

제30클라시카 군단

2.2.1.2. 제정시기 ¶

단대호

상징물

군단 주둔지

비고

제1아디우트릭스 군단

염소

판노니아

제1게르마니카 군단

황소

저지 게르마니아

제1이탈리카 군단

멧돼지

저지 모이시아

제1마크리아나 리베라트릭스 군단

아프리카

제1미네르바 군단

미네르바

저지 게르마니아

제1파르티카 군단

켄타우로스

시리아

제2아디우트릭스 군단

염소

판노니아

제2아우구스타 군단

염소

브리타니아

前제2사비나 군단

제2이탈리카 군단

암늑대

노리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창설.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로서 아프리카 야전군 및 일리리쿰 야전군에 들어감.

제2파르티카 군단

켄타우로스

시리아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가 되어 메소포타미아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제2트라이아나 포르티스 군단

헤라클레스

아이귑토스

제3아우구스타 군단

페가수스

모리타니아

제3키레나이카 군단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제3갈리카 군단

두마리 황소

시리아

제3이탈리카 군단

황새

라이티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11개 연대로 분할되어 다섯 연대는 라이티아 변경군에, 여섯 연대는 코미타텐세스로서 일리리쿰 야전군에 배속됨.

제3파르티카 군단

황소

시리아

제4플라비아 펠릭스 군단

사자

고지 모이시아

제4마케도니카 군단

황소

고지 게르마니아

제4스키티카 군단

염소

시리아

제5알라우다에 군단

코끼리

저지 게르마니아

제5마케도니카 군단

독수리

다키아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감.

제6페라타 군단

암늑대

유다이아

제6히스파나 군단

제6빅트릭스 군단

황소

브리타니아

제7클라우디아 군단

황소

고지 모이시아

제7게미나 군단

히스파니아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감.

제8아우구스타 군단

황소

고지 게르마니아

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존속

제9히스파나 군단

황소

브리타니아

108년 이후 기록 실종

제10프레텐시스 군단

멧돼지

유다이아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로서 팔레스타인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제10게미나 군단

황소

판노니아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일부는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갔고,
다른 일부는 리미타네이 연대가 되어 판노니아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제11클라우디아 군단

넵튠

저지 모이시아

제12풀미나타 군단

번개

카파도키아

유대전쟁 중 군단기 상실

제13게미나 군단

사자

저지 모이시아

카이사르가 로마 진군때 지휘.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일부는 리미타네이로서 시리아 변경군에 들어갔고,
다른 일부는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가 되어 트라키아 야전군에 들어감.

제14게미나 마르티아 빅트릭스 군단

염소

판노니아

카이사르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트라키아 야전군에 들어감.

제15아폴리나리스 군단

아폴로

카파도키아

카이사르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로서 오스로에네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제15프리미게니아 군단

포르투나

저지 게르마니아

제16플라비아 피르마 군단

사자

시리아

제16갈리카 군단

사자

저지 게르마니아

제17군단

저지 게르마니아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제18군단

저지 게르마니아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제19군단

저지 게르마니아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제20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

멧돼지

브리타니아

하드리아누스 방벽 건설

제21라팍스 군단

염소

판노니아

제22데이오타리아나 군단

아이귑토스

제22프리미게니아 군단

헤라클레스

고지 게르마니아

제30울피아 빅트릭스 군단

유피테르

저지 게르마니아

2.3. 켄투리오 ¶

Centurio. 백부장(百夫長)이라고도 한다. 시오노나나미로마인이야기에서 백인대장에 대해 미합중국 해병대중사 정도로 보는 것이 어떤가 하는 말을 심심하면 한다. 물론 백인대장은 현대의 개념으로 비추어 보자면 중대장에 가까운 자리겠지만, 백인대장은 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부대의 중핵을 이루는 부사관으로서의 성격 또한 가지고 있었다.

백인대장은 병사들과 말 그대로 동고동락하며 지내는 가장 가까운 장교였다. 백인대 이하의 편제가 없는 로마군에서는 최하위 장교이자, 최전선에서 싸우게 되는 일종의 부사관의 역할 및 현대 군의 행정보급관 역할까지 수행했다고 보면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

백인대장은 병사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병사들을 최전선에서 지휘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병사들은 백인대장의 역량에 대해 의심이 갈 경우 백인대장의 교체를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1대대의 1백인대장은 군단 전체의 최선임 백인대장으로 예우받았으며, 작전 회의에 참여할 권한도 있었고 군 내에서는 매우 명예로운 지위로 취급받았다. 주임원사나 마찬가지 지위인 셈이다.

백인대장 전사 시 지휘권 공백으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백인대에는 백인대장을 보좌하는 부백인대장(Optio)도 항상 편제되어 있었다.

2.4. 병과 ¶

여기 언급된 모든 병과들이 다 동일한 시기에 있던 것은 아니다.

이외에도 기수나 군악병 같은 보직은 있었지만 특별히 병과로 취급된 것이 아니고 어느 병과에 해당하는 병사이면서 그 보직을 겸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보직은 곁보기에는 의장대 같아 보이지만 실제론 회계 업무나 보급 업무 등 백인대장을 보좌하는 일종의 행정병이었기 때문에 해당 능력이 있는 고참병들이 담당했다.

또한 스페인 남쪽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고용한 투석병도 보조전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도 갈리아원정기에서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의 솜씨를 칭찬한 기록도 있다. 본래 카르타고에서도 활약했었다. 기둥에 빵조각을 매달아놓고 이를 맞추지 못하면 식사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공성전등 모든 전투에 반드시 필요한 궁병도 용병으로 자주 모집했다.[6]

정당한 급료는 물론, 보조군으로 일정한 기한을 복무하면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기 때문에, 로마군의 용병들은 일반적인 용병들과 달리 높은 충성도를 보이며 정규군과 함께 끝까지 싸운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특이하다. 제정 말기의 개판은 예외. 아버지가 보조군으로 장기복무해서 시민권을 따고, 아들이 그 시민권으로 군단병으로 입대해 복무한 사례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보조병 제도가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일단 로마군에게 고용된 보조병 대부분은 속주민이지만 아직 속주민이 아닌, 즉 게르만족처럼 로마군의 적인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왜냐면 게르만인들이 로마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보조병으로 복무하면서 로마의 전술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로마군이 게르만인들을 상대하기가 더 힘들어지게 된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로마군의 차별과 멸시가 심했기에 보조군들의 반란도 자주 일어났다. 특히 급료가 군단병들보다 적은데다 그 급료마저 제때 못받는일이 생겨서 이에 가장 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것도 많았다.[7] 특히 후기에 들어선 보조군 반란에 무려 9개 군단, 6만 명이 투입될 정도로 보조군의 반란이 갈수록 심해진다.

3. 로마군인의 생활 ¶

제정 시기 로마군은 1년에 3회 봉급을 받았으며, 이 돈으로 무기와 장비를 장만하고 의식주와 취미생활을 했다. 일반 병사의 봉급은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수준으로 일반 노동 임금자보다 조금 많은 정도였다. 약 70%를 식비와 의복비등의 생활비로 소모했으며, 특히 갑주랑 무기의 유지비가 가장 많이 들었다. 따라서 실제로 가용한 자금이 크게 부족하므로 성실한 병사는 이 돈을 낭비하지 않고 저축할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돈이 모자라는 병사가 많았다.

원래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 명목상 무기, 장비, 의복 등은 지급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럴 리가 없지. 그나마 징병제 말기에는 워낙 사람이 부족해서 재산이 거의 없는 병사도 전쟁터에 보내져야 했으니까 국가가 지급하기도 했지만 모병제 이후에는 병사들이 자기 장비값을 내는 공동구매 가 정착되었다. 이러한 봉급 부족은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의 병사 반란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고, 군 당국도 이걸 잘 알고 있어서 의외로 처벌이 가벼운 경우가 많았다.[8] 이 때문에 로마군이 사용한 투창인 필룸은 상당히 비싼 주제에 소모품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싸울 때마다 던지고 나서 전투 끝나면 다시 사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설상가상으로 필룸은 적군에게 군단 주력 병력들이 짤짤이를 넣을 중요한 수단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로마 후기에는 결국 다트형 투척 무기로 교체되었다.

다만 로마군도 이게 문제라는 인식이 없지는 않아서 일부 금액을 따로 떼어 저축하게 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그 외에도 퇴직금이 존재했다. 과거 공화정 시기에는 해산된 군단의 병사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지만, 제정 시기가 되면서 만기 전역하는 병사들에게는 퇴직금이 주어졌다. 물론 놀고 먹을 비용이라기보다는 재사회화 과정에서의 정착 비용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로마군은 17세부터 입대가 가능했으며, 만기 20년을 채운다 해도 고작 37세에 불과했다. 그리고 고대라고 해도 군단에 입대할 정도로 건강했다면[9] 적어도 15~20년은 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기 전역할 정도면 대개 자식도 여럿 두었기에 재사회화는 불가피했다.

제정 시기와 비교하면 내전기는 병사들이 금전적으로 풍족한 시기였다. 특히 상여금이 많았는데, 군 사령관들이 병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더 많은 상여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없던 카이사르는 부하 장교들에게 돈을 꾸어 상여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10]``[11]

내전기에는 장군들이 병사의 지지를 얻으려고 상여금을 마구 뿌려댔지만, 제정 시대에는 이런 관행은 없어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장군들이 군벌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장군들은 상여금을 마구 뿌려대서 병사들의 지지를 얻은 다음 그들을 자신의 사병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대신 아우구스투스는 봉급 수준을 모병제 도입 초기에 비해 3배 가까운 225데나리우스까지 올렸지만 그리 큰 돈은 아니었다고 한다.[12] 또 로마가 확장을 거듭할 때는 적의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 한 번 크게 저지르면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었지만 역시 제정 시대에는 확장이 멈추다시피했기 때문에 이런 일은 드물어졌다. 그나마 새로운 황제가 등극할 때나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관행적으로 소정의 상여금을 하사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 게다가 상여금의 부여 횟수나 금액도 내전기보다 줄어들었는데, 사실 국토가 넓어지자 지켜야 할 국경이 길어지다보니 영토 관리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부 사정도 좋지 못하고 로마의 적들도 갈수록 강력해져 로마가 확장 정책이 갈수록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로마 정부는 군인들의 처우를 적당히 개선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위에 언급한 도미티아누스의 봉급 인상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여가 시간에 농사를 짓거나, 닭을 기르거나, 그 밖의 잡일로 부업을 하는 병사도 적지 않았다. 하긴 봉급으로 먹고 살수가 있어야지. 서로 돈을 꿔주고 갚으라고 독촉하는 편지도 남아 있었다. 고향의 가족들에게 돈이 필요해서 돈을 부쳐달라는 편지도 발견되었다.

전리품은 병사들에게 분배되는 경우가 많았다. 약탈도 때때로 허용되었다. 게르만족 등 가난한 야만족과 싸우는 경우에는 전리품을 기대할 수 없었지만[13], 트라야누스 황제가 펼친 다키아 원정처럼 풍요로운 지역[14]으로 출동하는 경우에는 풍성한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나 파르티아는 부유하지만 막강한 적이다 보니 약탈하거나 전리품을 얻는다는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15]

이때문에 로마군은 약탈보다는 상여금에 관심이 많아져 후기에 가면 상여금을 올려달라는 병사들의 요구가 빗발친다. 하지만 이게 부작용을 가져왔는데, 왜냐면 황제랑 군 사령관들이 병사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화폐를 마구 찍어내서 상여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전기같은 경우에는 화폐의 귀금속 함유량이 높아서 실제가치와 명목가치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황제의 정통성과 권위가 추락하는 3세기의위기부터는 사실상 은화가 은도금한 동전으로 바뀌는 등 악화가 주조되는 바람에 심각한 물가상승을 초래했다. 그래서 상여금이 많이 지급되어봤자 물가상승으로 인해 병사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진게 없었다.

식사는 육체노동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 수행원이었다는 점에 비해서 매우 단촐했다. 기본적으로 이랑 보리로 만든 죽에다 병사 개인이 상비하고 다니는 건포도 같은 견과류, 양의 젖[16], 몇 가지 샐러드, 물에 탄 시금털털한 포도주가 전부였다.[17] 그나마도 샐러드에 뿌리는 소스는 주로 몸에다 바르는 올리브 기름이었다. 고기는 특별한 날에만 먹을수 있었다. 이건 서민들도 마찬가지라서 고기를 특별한 날 외에는 먹지 못했다. 고기를 많이 먹을수 있는건 부자들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가끔씩 사냥을 나가서 잡은 야생동물로 요리를 한다음 나눠 먹기도 했고, 강가나 해안가에 자리잡은 부대는 물고기나 해산물을 잡아먹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