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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4월 14일 대만에서 일어난 사건. 대만 범죄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사건이다. 물론 대만에서도 온갖 잔혹한 범죄가 매년 일어나지만, 이 사건이 특별히 최악으로 분류되는 것은 그 피해자의 연령이나 상황. 그리고 살해 수법이 상상 이상으로 잔혹했기 때문이다. 소위 대만판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Contents

  1. 바이샤오옌은 누구인가?
  2. 사건의 개요
  3. 사건 뒤의 이야기

1. 바이샤오옌은 누구인가? ¶

![PaiHsiao-yen.jpg](//rv.wkcdn.net/http://rigvedawiki.net/r1/pds/PaiHsiao- yen.jpg)

[JPG image (77.48 KB)]

바이샤오옌(왼쪽), 그녀의 어머니 바이빙빙(오른쪽)

바이샤오옌(白曉燕)은 대만의 배우가수인 바이빙빙(白冰冰)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일본 만화 스토리 작가 카지와라잇키. 그러나 바이빙빙은 카지와라 잇키의 폭력과 바람기를 견디다 못해, 바이샤오옌을 임신한 상태에서 대만으로 돌아왔고, 바이샤오옌을 출산한 뒤 자신의 성을 붙여 키웠다.

대만의 명배우인 어머니 덕에 TV에도 자주 출연했지만, 이상하게도 바이빙빙은 딸을 유명인의 딸로 키우기보단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키웠다. 이것이 사건의 원인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만.

2. 사건의 개요 ¶

1997년 4월 14일 바이샤오옌은 학교에 등교하는 도중에 범인들에게 납치되었다. 범인들은 바이샤오옌을 납치하자마자 폭행윤간했고, 심지어 바이샤오옌의 새끼손가락을 절단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바이샤오옌의 나체를 찍은 사진과 절단한 새끼손가락을 보내, 500만 달러를 몸값으로 요구했다.

바이빙빙은 어찌어찌 해서 500만 달러를 마련해 범인들에게 건네주려고 했지만, 경찰의 누군가가 언론에 바이빙빙의 딸이 납치되었다는 정보를 흘리는 바람에, 몸값을 건네주기로 한 장소에 기자들이 먼저 진을 치고 있는 사태가 발생했고, 범인들은 결국 몸값 받는 걸 포기하고 아지트로 돌아왔다.

바이샤오옌은 몸값만 받으면 풀려날 걸로 기대했다가 범인들이 몸값을 받는 데 실패하자 울부짖었고, 이렇게 되자 범인들은 바이샤오옌을 윤간하고 집단 구타한 끝에 결국 그녀를 잔혹하게 죽이고 말았다. 이들은 시신의 손발을 묶어서 타이페이의 하수도에 내다 버렸다.

4월 25일 경찰이 범인들의 아지트를 급습해 범인들 중 4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주범격인 3명은 도피한다.

4월 28일 바이샤오옌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의 광경은 실로 너무 처참했는데, 너무 너덜너덜한 시신이라, 발견자는 처음에 사람이 아니라 돼지의 시체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법의관의 부검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질식사였으나, 심한 구타로 간장이 파열되고 복강은 과다출혈로 부풀어 오른 데다, 늑골도 대부분 부러져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는지 머리카락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고, 두 눈은 도려낸 데다 목이 졸려 죽는 과정에서 밖으로 튀어나온 것으로 보이는 혀도 잘려 있었다고 한다. 귀에는 폭죽을 집어넣어 그 폭발 때문인 듯 고막이 파열되어 있었고, 몸 안에는 두 개의 쇠파이프가 박혀 있었으며, 못도 무려 48개나 나왔다고 한다. 그녀의 시신을 검시한 베테랑 법의관은 "법의관 생활을 오래 했지만, 이토록 끔찍한 시체는 처음 봤다"고 크게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고 하니 말 다했다.

일부 대만 언론이 시신 발견시의 사진을 그대로 찍어 보도했고, 이 사진은 일본에까지 넘어가서 일본 언론들에도 보도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자들의 행태에 이전 바이샤오옌의 몸값을 건네려 할 때의 기자들의 기레기 행태까지 더해져 유족들은 크게 분노해, "기자 유죄"라고 적은 큰 플랜카드를 집 앞에 붙일 정도였다.

이렇게 참혹하게 죽은 시신이었기 때문에, 바이샤오옌의 장례식은 가발을 씌우고 생전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붙이고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대만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당시 리덩후이 총통은 "범인을 발견하면 무조건 발포해 사살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문에 8월 18일 범인 세 명과 경관 800명이 타이페이 시내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였고, 경관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범인 중 한 명은 6발의 총탄을 맞고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

10월 23일 다른 한 주범이 타이페이 정형외과에 난입해 "자신의 얼굴을 성형하라"고 강요했다. 정형외과 의사가 협박을 받아 수술을 마치고 나자, 그 범인은 "내 얼굴을 봤으니 죽어줘야겠다"라면서 의사 부부를 살해하고 간호사는 강간한 뒤에 살해했다. 그러나 11월 17일에 다시 경찰에 발각되었고, 이 범인도 자살을 택했다.

마지막 남은 범인은 도주를 계속하다가, 11월 18일 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관의 주재무관 관저에 침입해 5명의 인질을 잡고 인질극을 벌였다. 그러나 민진당의 사장정이 범인을 설득해 보겠다고 나서 직접 교섭한 끝에 결국 투항하여 체포된다.

이후 재판에 넘겨진 범인은 1998년 1월 22일 5건의 유괴, 강도, 살인에 대하여 모두 사형, 다른 폭행 사건 등으로 징역 59년 6월형을 선고받았고, 이듬해인 1999년 10월 6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나머지 범인들 역시 사형까지는 아니지만 범죄에 걸맞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바이빙빙은 이것으로 정의가 실현된 건 아니라고 주장했다.

3. 사건 뒤의 이야기 ¶

이 사건의 원인을 두고 바이빙빙이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자들이 중심이 된 폭력단을 규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친 것이 원인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이들은 반일(反日)적인 성향이었는데, 바이빙빙이 일본인과 결혼해 딸을 두어 눈엣가시처럼 여기다가, 바이빙빙에게 보복하기 위해 바이샤오옌을 납치해 끔찍하게 살해했다는 것. 물론 명백한 증거는 없으며, 이를 진술할 범인 셋은 10여 년 전에 자살 혹은 사형으로 다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추적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바이빙빙이 바이샤오옌을 보통 사람의 아이처럼 키운 이유도 일본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여서, 세간의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아서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으로 바이샤오옌이 죽게 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장본인이, 당시 리덩후이의 뒤를 이어 차기 총통으로 주목받고 있던 롄잔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언론에 바이샤오옌의 납치 사실을 흘린 장본인이 렌잔의 측근이고, 렌잔은 평소에도 반일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 바이빙빙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탓이라는 것이다. 롄잔은 이를 부인했으나, 대만 국민들에게는 이 소문이 렌잔의 이미지를 안 좋게 했는지, 결국 롄잔은 천수이볜에게 패해 민진당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만다. 물론 롄잔의 패배에는 쑹추위가 친민당을 만들어 나가는 바람에 보수표가 나뉜 게 가장 큰 원인이었으나, 이 사건도 영향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듯.

바이빙빙은 딸의 죽음을 계기로 사형제 폐지 반대 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며, 대만 정부도 이러한 사건의 존재를 이유로 사형제를 유지하고, 매년 수 명씩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