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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이콘으로 형상화된 스기하라 지우네

杉原千畝 1900.01.01~1986.07.31

일본인 오스카 쉰들러 (혹은 일본판 욘 라베)

Contents

  1. 개요
  2. 본문

1. 개요 ¶

일본제국리투아니아 영사관 영사로서 독일로부터 수천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살린 인물.

2. 본문 ¶

1900년 기후 현 야오쓰 정(八百津町)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의사가 되기를 희망한 부친의 의사에 반하여, 1918년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영어과예과에 입학했다. 1919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이후 대학을 중퇴하고 중국 만주 공관에서 근무했으며 독일어러시아어를 배워 對러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39년, 리투아니아 영사로 임명된지 얼마 되지 않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는데, 그의 임무는 소련군과 독일군의 움직임을 파악하면서 소련이 독일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는지 상황을 살펴보고 자세한 정보를 일본 정부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1940년, 소련군리투아니아를 급습해 점령하고 각국 영사관을 폐쇄하자 나치 독일을 피해 외국으로 빠져나가려던 유태인들은 유일하게 남아있던 일본 영사관으로 몰렸다. 그러자 스기하라는 소련 당국과 접촉해서 유태인들을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대피시키는 것에 동의를 얻어낸 뒤 그들을 위해 일본 비자 수천 장을 정부의 허락도 없이 불법으로 발급했는데 그것도 직접 일일이 손으로 썼다(!)고 한다. 심지어 발급 자격에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임의로 자격 요건까지 완화해가면서 일본 영사관 마저 폐쇄 당할 때까지 2달 동안 하루에 무려 20시간이나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면서 비자를 만들었고, 영사관 폐쇄 이후 리투아니아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도 비자를 만들었으며, 기차가 떠나기 시작하자 자기 서명이 담긴 서류뭉치와 도장을 창밖으로 던져 피난민들이 스스로 비자를 완성하도록 조치했다.[1]

일본 비자를 받은 유태인 난민 6000여 명은 무사히 시베리아를 건너 일본을 거쳐 상하이미국으로 대피한다.[2] 명백한 정부의 훈령 무시이자 불법 행위였으므로 일본 만주 공관은 이들을 다시 쫓아내려했으나 놀랍게도 당시 외무대신은 이를 묵인하고 유태인들이 일본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괘씸죄가 적용되었는지 스기하라는 전후 1947년 외무성 직원의 정리 해고 과정에서 면직되었다.

1941년, 그는 리투아니아를 떠나 독일의 보호령이었던 체코 슬로바키아 총영사로 부임하여 계속 독일군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런데 하필 폴란드 망명 정부의 참모 본부 장교와 협력했다가 독일로부터 간첩으로 의심받아 게슈타포의 감시까지 받게 되었다.[3] 2차 세계대전 막바지 무렵 그는 가족과 함께 체코 슬로바키아에 진군한 소련군에게 8개월 동안 구금되었다가 일본으로 귀국했다.

1969년에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후, 1985년에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야드바셈상을 수상하고, 예루살렘에 기념 현판이 설치되는 등 "열방의 의인"으로 기려졌다. 정작 일본 내에서는 명예회복이 매우 늦었는데 이스라엘의 유대인 협회가 처음 스기하라라는 성을 가진 외교관의 소식에 관해 문의했을 때 일본 정부는 당시 그 성을 가진 외교관이 3명 있었음에도 그런 사람 없다(...)고 답변하며 시큰둥하게 넘어갔고, 이후 정체가 밝혀져 공로를 인정받았음에도 오히려 우익 언론과 외무성을 중심으로 법을 어긴 사람(...)이라며 비판하는 주장이 터져 나오기까지 했다. 결국 그가 죽은 지 14년이 지난 2000년에 들어서야 공식적으로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이래놓고 일본 정부와 아베는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게 일본도 스기하라같이 유대인을 구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개드립을 시전중이다.](http ://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8&aid=00022610 22) 마치 욘 라베가 중국인을 구했으니 나치 독일도 중국인을 구하는데 최선을 다했다는 개소리와 다를 바 없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유대인 협회들이 그의 이름을 언급하며 일본을 위한 의연금을 모금하여 기부하기도 했다.

메탈 밴드 새버티지의 명곡 중 하나인 Chance가 지우네의 일화를 소재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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