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1. 개요
  2. 역사
  3. 내용
  4. 왜검을 보는 조선인의 시각
  5. 왜검을 보는 일본인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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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왜검(倭劍)은 조선에서 일본도와 일본 검술을 부르던 이름이다.

한편으로 조선의 철저하게 실용적인, 무기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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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

단병접전에 능한 왜구의 검술에 학을 뗀 조선은 항왜(降倭)들로부터 그들의 검술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것이 왜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무예제보번역속집에도 실려있고 그 설명이 무예도보통지와 다르게 매우 상세하다는 것을 볼 때 당시에는 역시 활에만 집중한 미친 검술에 대한 조선 군인의 실력이 매우 낮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정조 시대에 김체건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왜의 검술을 배워오는데 이는 약간 사서의 의견이 갈린다. 왜관에서 배웠다는 설과 직접 왜국에 건너가서 배워왔다는 두가지 설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왜인과 직접 접촉해서 검술을 배운 것은 사실이며 그 기예의 수준은 매우 높았다고 추정된다. 그런 면에서 김체건이라는 인물이 타고난 천재의 기질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검을 배워온 뒤 왕 앞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그 묘사가

'그가 한번 우러러 고함을 지르자 순간 모인 사람들 모두가 정신을 잃을 뻔 했으며 칼을 휘두르는데 칼에 가려 그의 몸이 보이지 않았고 재를 뿌리고 맨발로 그 위를 뛰었는데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라고 한다. 고함을 지른 것은 특유의 기합을 낸 것으로 보이고 칼에 가려 그의 몸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검을 빠르게 사방으로 휘두른 것으로 보이고[1]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는 부분은 일본 무술 특유의 보법인 스리아시, 일명 끄는 발로[2] 추정된다. 스리아시는 발 뒤꿈치가 지면에서 살짝 떨어져서, 앞꿈치와 뒷발의 미는 힘만으로 몸을 운용하기 때문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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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용 ¶

무예도보통지에 전하는



왜검은 4가지로 토유류, 운광류, 유피류, 천유류 이렇게이다. 그리고 이 모든 기법을 연결해서 하는 왜검총보가 있는데 다른 기록에 살펴보면 구보인 무예신보는 8개 유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김체건이 배워온 검법 유파는 사실 8개라고 보는 설도 있다. 허나 어쨌든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던 정조시절에는 다 실전되고 오로지 운광류 하나만 전한다고 했다.왜검은 뒷방 늙은이 신세

운광류는 그 기법이 매우 간단해서 천리세, 속행세, 산시우세[4], 수구심세, 류사세로 이루어져 있고 기법은 주저앉으며 한 번 내려치고 앞으로 나가며 한 번 치고 또 앞으로 나가며 한 번 치고 솟구쳐서 한 번 치는 수법을 5회 반복하는 것이다.[5]

이것이 왜검의 궁극적 목적과 가깝기에 정수만 모아서 남은 것이라는 시각도 있고 또는 그냥 쉬우니까 남았다는 설, 무예신보, 무예도보통지를 만들 시절에는 이미 예도나 본국검 같은 조선의 검술이 존재했기에 왜검을 거의 버렸다는 설도 있다.

왜검은 결국 일본의 고류검술들과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오히려 고류검술들의 경우는 하나의 形에도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현대까지 맥이 끊기지 않았다는 장점이 있다. 왜검은 오히려 매우 원시적인 수준의 일본검술 기법을 담고 있다.

이 왜검의 마스터인 김체건은 훗날 '교전(交戰)' 을 만들기도 했다. '교전'은 일본 검술 유파의 가타(形)와 유사하다.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무예도보통지의 교전은 5합 이내로 끝나는 에도시대 유파들의 가타와 달리, 가토리 신토류 등의 전국시대 류파들과 같이 15합이 넘어가는 긴 형태의 가타라는 점이다. 큰 사선베기로 마무리하는 일본의 형과는 달리 마지막은 칼을 내던지고 씨름으로 마무리한다는 점이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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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필요 없어! 뎀벼!! 조선의 패기 칼은 내다 버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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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검을 보는 조선인의 시각 ¶

조선이 굴욕을 참고 왜검을 배웠다는 시각이 존재하지만 사실 왜검을 쓰는 것이 굴욕이었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 당대에는 일본의 검술이나 일본도를 무기로 쓰는 것에 뭔가 깊은 뜻을 두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단지 부족하니까 진 것이고 부족한 것은 배워서 메꾼다는 발상.

그 시대에 검술이나 검은 현대로 따지면 이나 미사일 같은 것과 다를 바 없이 하나의 무기이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단순한 도구에 불과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사례로 보아 효과적으로 살상을 할 수 있는 무기라면 적의 것이라도 거리낌없이 도입하는 지극히 실용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왜검 이외에도 조선의 화약 무기, 두정갑 같은 갑옷 등의 무기들은 고려 시대에 민족적 굴욕을 안겨다 주었던 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사용하여 크나큰 피해를 주었던 조총 역시 왜군의 무기라고 해서 배척하지 않고 왜란 중에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왜란 후에는 제식 무기로 삼을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청나라에서 사용해서 병자호란 때 큰 피해를 준 홍이포를 도입하는데도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왜검 역시 이러한 '무기 도입' 사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오히려 검이나 무기에 민족혼을 담아 운운하는 것은 일본 문화의 관점에 가까운 것이다.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일본도=가타나를 오직 사무라이에게만 착용하도록 하여 사무라이의 신분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삼았으며, 그리하여 가타나는 사무라이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전근대시대가 끝나 근대시대가 되면서 검이 시대에 뒤떨어진 무기가 되자, 근대 일본에서는 무사도이니 하는 것을 내세우며 검을 신성화 시켰다. 이렇게 검 자체를 신성화 한 것은 특유의 애니미즘 사상과 결합한 일본 문화의 특색인 것이다.

조선에서는 원래 유교가 성행하여 애니미즘이나 상징주의가 일본처럼 성행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무기의 유래에 애니미즘스러운 집착을 가지기보다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더 중요한 의미를 두는 실용적인 관점이 강했다. 애초에 딱히 칼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많지 않았을 뿐, 칼을 소지하는 것도 신분적인 상징이 아니었다.

이는 검이나 검술과 관계된 조선의 민담에서도 드러난다. 민담에 따르면 부산진전투에서 활약한 첨사 정발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에서 왜검을 사왔으며, "난리가 나면 이 검으로 왜인들을 벨 것이다."고 맹세하고 왜인들을 베었다고 전해진다. 검술에 관한 민담 중에는 한 소년이 항왜로부터 검술을 전수받고, 그 검술로 일본에서 온 달인들과 겨뤄 이겼다는 것도 남아있다.

조선 사람은 무기나 검술이 단지 도구에 불과한 것이며, 도구를 사용하는 의(義)는 도구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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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왜검을 보는 일본인의 시각 ¶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검술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검술을 명나라나 조선 등이 익히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혐한이 아닌 이상, 위의 왜검을 보는 조선인의 시각과 비슷한 입장이라 봐도 무방하다.

다만 일본에서 왜검에 흥미를 갖는 이유는 왜검에 전국시대 초기 유파의 형태가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게류 등의 원시 유파들은 실전 되었고, 이를 계승한 야규파 등의 류파도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형태와 많이 달라졌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인들은 지극히 단순하지만, 기량과 기백을 중시하는 운광류 등이 원시 유파의 형태가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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