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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박마리아와 이기붕.[1]

"은 가지고 놀라고 준 게 아니라, 쏘라고 준 겁니다."[2]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청년기

2.2. 정계진출

2.3. 2인자 등극

2.4. 부통령이 되고야 말겠다!

2.5. 최후

  1. 평가
  2. 창작물에서의 이기붕

4.1. TV 드라마

  1. 기타

1. 개요 ¶

이기붕(李起鵬, 1897.01.22-1960.04.28[3])은 제1공화국 시절의 정치인이다. 호는 만송(晚松)이다.

2. 생애 ¶

2.1. 청년기 ¶

1897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산리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독자로 태어나 과부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선교사의 도움으로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연희전문학교를 다녔으나 중퇴한다. 일본을 거쳐 도미하여 아이오와 주 데이버 대학 문학과를 졸업했다. 미국에서 대한국민회 회장으로 있던 이승만을 만났고, 허정과 함께 삼일신문을 발간하였는데 이 때부터 이승만과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

유학시절 신민회 집회에서 박마리아를 만나 1931년 약혼했다가 박마리아의 귀국으로 약혼이 취소되었지만, 1935년 이기붕이 귀국하면서 다시 재회하여 결혼했다. 귀국 후 이기붕은 북촌 일대에서 가회상회를 운영했지만 실패했고, 중추원 참의 최남이 경영하던 종로 국일관[4] 지배인을 지냈다. 이 무렵 세 아들인 강희, 강석, 강욱을 두었다. 다방 <종로>를 경영하기도 했고, 건축청부업사무소 개설등 잡다한 일을 거쳐 일제 말기엔 허정과 함께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채 8.15광복을 맞았다.

2.2. 정계진출 ¶

이렇게 하던 일마다 잘 안 되던 잉여로운 사람이었는데,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의 개인 비서가 된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의 아내 박마리아가 출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이승만 주변에 붙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특히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가 당시 여성 정치인 임영신[5]``[6]과 불화가 있었던 틈을 타[7]``[8] 박마리아는[9]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프란체스카 여사와 친분을 다져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지위로나 별 볼일 없었던 남편을 정계에 들이는데 성공했다.

이 덕분에 이기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고 서울시장을 지냈다. 사실,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때의 이기붕은 의외로 꽤 청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뭐라고요? 한강다리를 끊고 후퇴를 할 때는 "서울시장이 된 책임으로 남겠다."라고 주장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만약, 여기서 책임을 지고 남았다가 인민군에게 죽었다면, 역사교과서에서는 당연히 좌우익을 막론하고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간신배가 아니라, 역사에 길이남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영구까임방지권으로 인정하는 위인으로 실렸을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나마 지나가는 말로 시민들에게 사과한 사실도 있으니 어떻게 보면 누구보다 나은 점도 있는 셈.

2.3. 2인자 등극 ¶

국민방위군사건이 터지자 이를 기회삼아 신성모 국방부 장관을 몰아내고[10]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여 제2인자로 등극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주동자들을 공개처형하는 강수까지 두면서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서 인기를 끌었다. 아무튼 여기까지는 당시의 혼탁한 정계 상황을 감안해서 뭐 그렇다 쳐도 이제부터는 정치깡패 이정재를 영입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무리수가 많아지기 시작한다.

자기 아들 이강석을 후사가 없었던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다졌다. 당시 법에는 장자는 다른 집 양자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이걸 어기고 양자로 입적시켰다고 한다. 더군다나 양녕대군파인 이승만과 효령대군파인 이기붕간의 관계는 문중에서도 장자 넣기가 좀 곤란한 것도 있었다. 세간에서는 아들 팔아 출세한다고 깠다. 그런데 이기붕 입장에서도 가장 똘똘해 보였던 이강석을 내주기 싫어서 둘째 주면 안 되냐고 했다가 이승만이 이강석 아니면 싫다고 해서 이강석이 양자로 넘어간다.

2.4. 부통령이 되고야 말겠다! ¶

하지만 이렇게 잘나가던 이기붕에게도 시련(?)이 있었으니 바로 1956년 정, 부통령 선거. 이기붕은 무난하게 이승만과 함께 러닝메이트로 대선에 출마했다. 그러나 세간의 인망이 없었는지 이승만은 당연히 당선되었지만, 이기붕은 장면에게 밀려 미끄러지고 말았다. 낙선한 이유는 이기붕의 스펙이 떨어진 것도 있었으나[11] 당시 국민들이 자유당 정부에 염증을 느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부통령은 대통령에 대한 견제심리 때문에 기본적으로 친 야당 후보에 대한 지지가 높았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조차 승리를 장담못했을 정도였으나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가 급사하는 바람에 무난히 당선된 것이었다. 신익희에 비해 훨씬 인지도가 낮았던 대통령 후보 조봉암조차 대선에서 30%가 넘는 지지율을 받았을 정도였다.[12]

부통령 당선의 가능성이 낮자 이기붕은 거슬리는 장면을 제거해야겠다라면서 장면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장면부통령 저격사건 참조.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도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후계구도를 명확히 하겠다고 3.15부정선거라는 최악의 병크를 터트렸다. 3.15 선거때 야당이였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두달여를 앞두고 급사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은 단독후보가 됨으로써 재선은 확실한 상황이였다. 그런데도 부정 선거를 한 이유는 이승만이 당시 매우 고령이라(한국나이로 86세) 사실상 대통령 직을 무난히 마칠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었다. 때문에 부통령은 사실상의 대통령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고 이 부통령 자리에 당선되기 위해 이기붕은 부정선거를 저지른 것이였다.

상황이 매우 나빠지자 4월 22일의 국무회의는 이기붕을 사퇴시키기로 합의했고 국방장관 김정렬, 법무장관 홍진기에게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4월 19일 성난 군중이 자신의 집으로 몰려온 것을 본 이기붕은 겁을 먹고 서대문의 저택을 빠져나와 포천의 6군단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이미 스스로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식사는 못해서 미군이 준 주스로 연명했으며 말도 박마리아가 옆에서 알아듣게 설명해줘야 겨우 알아들었다고 한다. 김정렬 장관의 연락을 받고 서대문의 집으로 돌아간 이기붕은 김정렬 장관에게 부통령 당선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기붕은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졌고 잠시 후에 난 그럴 재목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잘되었단 말을 했다. 그럴거면 왜 부정선거를 하셨나

김정렬 장관은 중앙청의 국무회의실로 가서 이기붕의 사퇴 수락 소식을 전했고 한갑수를 시켜 사퇴 성명을 쓰기 시작했다. 국민 여론을 달래기 위해 사퇴 성명을 최대한 감명스럽게 쓰란 명령이 내려졌다. 한편 이기붕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에게 부통령 당선자 자리에서 사퇴를 하겠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고 김정렬 국방장관이 설득하고 나서야 겨우 동의했다. 하지만 다음날의 신문기사엔 이기붕 사퇴가 아니라 이기붕 사퇴 고려란 기사가 실렸다. 국무위원들은 김정렬 장관에게 항의했고 조사 결과 자유당 강경파들의 반발로 사퇴 성명서가 사퇴 고려 성명서로 후퇴한 것이다. 여론이 들끓자 다음날에 이기붕은 직접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이란 의사를 발표했다. 하지만 4월 25일에 이기붕의 집은 기어이 파괴되었고 이기붕은 다시 6군단으로 달아났다. 이때 1군 부사령관 민기식 장군은 이제 이기붕은 8도 강산 어디에도 살 수 없으니 자결하거나 망명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란 말을 남겼다. 이기붕 일가는 경무관 별관 36호실로 옮겼다.

2.5. 최후 ¶

결국 4.19혁명이 일어난 지 9일째 되던 4월 28일 새벽 5시, 이승만에게 양자로 보낸 장남 이강석(당시 육군 소위)이 친족들을 모조리 총기로 살해하고 이강석 스스로도 자살했다. 참으로 비참한 최후였다. 이기붕 사망 당시 나이 만 63세. 공교롭게도 같은날 아침 미국 대사 맥카나기는 이기붕 내외의 망명 신청이 수락되었다는 미국 정부의 뜻을 전달한 상태였다.

이강석이 어떤 심정으로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가족들 전부가 같이 죽기로 합의하고 죽은 것이란 말도 있다. 하지만 훗날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강석의 시신엔 머리와 가슴에 총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머리에 한발 가슴에 한발 쏘았다는 말이므로 타살론이 나왔다. 타살론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였던 곽영주가 이기붕 일가를 살해해 국민여론을 달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막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다음날 하야한다.[13]

그러나 자살론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이강석이 권총 두 자루를 준비하여 머리와 가슴에 각각 대고 쏘았다고 본다. 한 자루의 총만 사용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데, 이는 사실 종종 있는 일이다. 로베스피에르의 경우에도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하려다가 손이 떨리는 바람에 턱을 쏘고 말았고, 그 상태에서 정적들에게 체포되어 응급처치를 받고 단두대로 보내져 목이 잘렸다.

3. 평가 ¶

3.15 부정선거 및 이승만의 양자 관련으로 한국 권력 2인자를 굳히면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가 무너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자이자 대한민국 정치인 사상 최악의 인물로 손꼽히는 자…이지만 욕은 이승만이 거의 다 먹는 듯하다. 지금은 이승만이 욕을 다 먹고 있지만 부정선거 이후 사회 분위기는 이기붕이 부정선거 책임자로 욕먹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시민들은 이승만이 독재자이긴 해도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민 대표를 보내 정중하게 면담을 요청했고, 이승만도 당시 나이가 워낙 많아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고 더 버티는 게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는지 하야를 선택했다.

물론, 2인자인 이기붕의 입지는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존립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1인자인 이승만의 책임은 부인할 수 없다. 어쨌거나 현재의 평가로서는 이승만도 논란의 대상이지만 이 사람은 뭐라할 것도 없이 간신 취급을 받으며 이승만 옹호자들에게도 미움받는다. 아예 이승만이 하야하거나 부정선거에 얽힌 것도 죄다 이기붕 탓이라고 책자로 비난하고 이기붕만 없었더라면 이승만이 비참하게 해외에서 객사하지 않았을테고 평가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단체도 있으니 말다했다.

이렇듯 이승만을 옹호하는 보수 쪽에서 이기붕 탓으로 돌리며 이승만을 필사적으로 옹호하지만 그 반대로 이승만을 비난하는 쪽에선 그러한 간신배 이기붕을 오냐오냐하고 차기 권력자를 물려주려고 한 것만 봐도 이승만도 다를 게 없었다고 깐다. 그리고 이건 박정희와 2인자 차지철을 보수건 진보건 똑같은 평가. 즉 양쪽에서 차지철이나 이기붕이나 신나게 비난을 듣고 있다. 즉 한 쪽은 최고 권력자를 옹호하기 위한 악역으로서 희생양(?), 한쪽은 그 권력자의 2인자로서 그놈이 그놈이라는 평.

4. 창작물에서의 이기붕 ¶

4.1. TV 드라마 ¶

드라마 무풍지대에서는 권성덕[14] 야인시대에서는 이인철[15] 두 드라마의 극작가 같아 드라마내의 이기붕의 모습은 비슷하다. 이강석이 권총으로 가족을 쏘고 마지막으로 자신도 자살하는 것으로 묘사했으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인지 나레이션을 통해 "이기붕 일가의 죽음이 곽영주가 주도한 타살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며, 이는 앞으로 역사가들의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5. 기타 ¶

참고로 혁명 직전까지만해도 이 양반 찬양하는 서적인 "민족의 해와 달"이라는 책이 출간되어 아예 이승만을 민족의 해, 이기붕을 민족의 달로 찬양하였다.[#](http://www.bookhunter.co.kr/shop/shopdetail.html?brandcode=036000000 519&search=%C0%CC%B1%E2%BA%D8&sort=) 흠좀무. 출판업계까지 권력에 순종하였다는 증거인데, 책이 나온지 1년만에 혁명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 그야말로권력무상이다.

박마리아의 서적도 꽤나 충격적이라는데. 이 서적을 신촌 헌책방에서 본 마광수 교수의 에세이에 보면 "누가 이 글만 알고 박마리아가 나쁜 사람인지 생각할수 있는가!"라고 한탄했다.[16]

이승만의 정치분석 서적 일본 내막기의 번역에도 이기붕과 박마리아가 관여했다.[17] 책을 번역 의뢰받은 분은 기껏 번역했더니 박마리아가 중간에 가져와서 최덕신 번역으로 먼저 책을 만들어 이승만에게 선물했다…나중에 이 책은 동일한 번역자의 손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내막이라는 제목으로 80년대 재출간된다.[18]

코미디 전망대라는 SBS에서 방영했던 시사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이기붕의 5.18 혁명 전후 시점 일대기를 간략하게 에피소드로 내보낸 적이 있다. 노년 배우 양택조가 이기붕을 연기했으며, 아들인 이강석은 코미디언 출신 뮤지컬 배우 정성화가 연기했다. 이승만은 김구라가 노년 이승만으로 분장. 말 그대로 코믹하지만 실로 간사한 간신의 연기를 얄미울 정도로 소화. 여기서 최후는 가장 많이 알려진 가설 중 하나인 이강석이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 가족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는 가설을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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