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전투 중 하나, 1592년 7월8일에 치루어졌다.

이치 전투

날짜

1592년 음력 7월 8일

장소

조선 전라도 진산군 외곽 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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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조선 왕국

쇼쿠호 일본

지휘관 권율
황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병력 1000명

2000명

피해 규모 불명

불명

결과

조선군의 전라도 방어 성공.

한산도 대첩과 함께 1592년 일본군의 전라도 공략을 무산시킨 전투.

Contents

  1. 배경
  2. 전투전개


  3. 결과
  4. 대중 매체

1. 배경 ¶

이 전투는 용인 전투의 대패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용인전투의 패전 이후 전라도는 사실상 방어병력이 괴멸되었고, 잔존 병력들이 각 지역에 할거하는 수준이었다. 이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w iki/%EA%B3%A0%EB%B0%94%EC%95%BC%EC%B9%B4%EC%99%80%20%EB%8B%A4%EC%B9%B4%EC%B9%B 4%EA%B2%8C)의 6군 약 2만 병력이 전라도 확보를 위해서 움직였다. 하지만 경상우도에서 전라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의병들에게 방해를 받았던 타카카게는 병력을 2로로 나누었다. 1군 병력은 자신이 이끌고 금산으로 나아갔고, 2군은 핵심참모였던 안코쿠지 에케이에게 줘서 무주를 점령하게 했다. 용인전투의 패장인 전라감사 이광이 이 두 지역의 요지인 팔랑치에서 막으려고 했으나 결국 뚫렸다. 이후는 파죽지세로 금산과 무주도 역시 함락된다. 이 다음 목표는 당연히 조선의 자존심인 전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자신의 부장 안고쿠지 에케이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무주에서 출발하여 웅치를 거쳐서 전주성을 공격하도록 하고, 자신은 2000의 군사를 이끌고 금산성에서 출발하여 이치를 거쳐서 전주성으로 나가는 루트를 선택한다.

용인전투의 패배와 금산성 함락 이후, 전라도의 거의 전 병력이 전주로 집결한다. 광주목사 권율, 화순현감 황진, 해남군수 변응정,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 의병장 황박 등이 대표적이다. 이 병력이 둘로 나뉘어서 무주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인 웅치에는 정담, 이복남, 변응정, 황박이 나가고, 금산에서 전주로 올라오는 길목인 이치에는 권율과 황진이 나갔다. 그리고 웅치와 이치에서 모두 패한다면 전주성으로 퇴각하여 최후의 방어전을 펼칠 계획을 세웠다.

바로 이치 전투가 벌어지기 하루 전, 7월 7일에 웅치에서 안코쿠지 에케이가 조선 관군+의병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일본군 측도 손실이 컸다. 그리고 다음날 코바야카와의 2000 군대가 드디어 권율이 이끄는 전라도 군과 이치에서 마주치게 된다.

2. 전투전개 ¶

권율은 일단 전라도 방어선을 두개로 나누었는데, 그 하나가 바로 이치였고, 만일 이치 방어선이 전부 무너진다면 패잔병들은 전부 전주성으로 후퇴에 전주성을 2차 방어선으로 싸울 계획이었다.

권율은 고지를 유지하면서 전투했는데, 이때 화살로 엄호 사격을 하던 황진은 적탄을 맞고 후방으로 후송된다.

이치 전투 사이에 안코쿠지 에케이는 이미 전주성에 도착했지만, 고경명이 이끄는 7천 의병이 금산성을 친다는 보고를 듣고 급하게 후퇴해야 했다.[1]

어쨌든 고경명의 의병 때문에 코바야카와는 후퇴하게 되고, 이치 전투는 승리로 끝난다.

3. 결과 ¶

정확한 사상자는 불명, 다만, 한산 대첩과 함께 연이은 패전으로 인해 일본군은 전라도 공략 실패 이후로는 강화 및 조선 내 국지전으로 전투방식을 바꾸게 된다.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에 의하면 사위인 이항복과 이야기를 나누었을때, 권율은 이 이치전투를 자신의 제일 자랑스러운 전공이라고 했다고 한다. 잡아낸 적은 행주대첩이 더 많지만, 행주대첩과 다르게 이치에서는 턱없이 부족한 군비로 일본군을 몰아내어서 그렇다고.

세상에서는 내가 행주에서 한 일을 공으로 삼는데, 이는 참으로 공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나는 항오(行伍) 사이로부터 일어나서 공을 쌓은 것이 여기에 이르는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적잖이 치렀다. 그 중에 전라도(全羅道) 웅치(熊峙)에서의 전공(戰功)이 가장 컸고 행주의 전공은 그 다음이다. 그런데 나는 끝내 행주의 전공으로 드러났으니,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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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웅치의 싸움은 변란이 처음 일어날 때에 있었으므로, 적(賊)의 기세는 한창 정예하였고, 우리 군사는 단약(單弱)한데다 또 건장한 군졸도 없어서 군정(軍情)이 흉흉하여 믿고 의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능히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血戰)을 벌여서 천 명도 채 안 되는 단약한 군졸로 열 배나 많은 사나운 적군을 막아 내어 끝까지 호남(湖南)을 보존시켜 국가의 근본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어려웠던 이유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서로(西路)가 꽉 막히어 소식이 통하지 않았고, 본도(本道)가 패하여 흩어져서 사람들이 대부분 도망쳐 숨어 버렸으므로, 내가 비록 공은 있었으나 포장(褒獎)해 줄 사람이 없어 조정에서 그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그러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없는 깜깜한 밤에 자기들끼리 서로 격살(擊殺)한 것과 같았으므로, 공이 드러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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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행주의 싸움은 내가 공을 세운 뒤에 있었으므로, 권위(權位)가 이미 중해져서 사심(士心)이 귀부(歸附)하였고, 호남의 정병(精兵)과 맹장(猛將)이 모두 휘하에 소속되어 군사가 수천 명을 넘었고 지리(地利) 또한 험고하였으며, 적의 숫자는 비록 웅치에서보다는 많았으나 그 기세가 이미 쇠해졌으니, 이것이 공을 세우기가 쉬웠던 이유이다. 게다가 마침 천병(天兵)이 나와서 주둔하고 우리 나라 제로(諸路)의 근왕병(勤王兵)들이 바둑알처럼 기전(畿甸)에 포치(布置)되었을 때, 강화(江華)로 피란 가 있던 도성(都城)의 사민(士民)들이 우리의 승전(勝戰)을 학수고대하던 터에 나의 승전이 마침 다른 여러 진영(陣營)보다 먼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쉽게 드러날 수 있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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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 <백사집> 잡기에 수록된 권율의 말

4. 대중 매체 ¶

드라마 불멸의이순신에서는 한산도대첩 편에서 함께 등장한다. 고지에서 조선군이 집중 포격을 퍼부은 뒤 일본군과 백병전을 치르고 따로 별동대를 동원해서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양상으로 등장한다. 코바야카와의 "권율이라고 했더냐? 네 이놈을 내손으로 베고야 말 것이야"와 권율의 "이게 끝은 아니다. 마지막 공격이 남았느니라"의 독백 대결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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