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烈王后 韓氏
1594~1635

조선 제 16대 군주인 인조의 정비이자 조강지처이다. 소현세자효종의 어머니이다. 인렬왕후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다.

Contents

  1. 생애
  2. 성격
  3. 인열왕후의 사후

1. 생애 ¶

인열왕후는 강원도 원주출신이며 아버지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이다. 1594년(선조 27년)에 원주읍내 우소에서 태어났으며, 1610년(광해군 2년)에 17세의 나이로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하고 혼인하여 청성현부인이 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 장남인 이왕(훗날 소현세자)를 낳고,7년 후에 차남 이호(훗날 봉림대군 효종)를 낳았다.그녀가 시집을 오면서 시동생인 능창군의 죽음과 화병으로 급사한 정원군을 목격한 한씨는 1623년(광해군 15년) 남편 능양군이 쿠테타로 광해군을 쫓아내고 보위에 올라(인조반정) 아내 한씨는 왕비가 되었다. 이후 한씨는 적극적으로 남편 인조에게 진심으로 조언을 하기도 하였다.1635년(인조 12년) 12월 5일에 창경궁 여휘당에서 아들을 사산하자 그 충격으로 한씨는 산욕열에 걸려 나흘 후에 42세의 나이로 사망 하였다(1635년 12월 9일).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仁),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열(烈)이라 하여 인열(仁烈)의 시호를 받았다. 원래 인조는 명헌(明憲)의 시호를 내리길 원하였으나, 대사헌이었던 김상헌이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 관원이 아닌 군주의 의향대로 할 수 없다 하여 바꾼 것이다. 전호는 숙녕(肅寧), 능호는 장릉(長陵)이다. 후일 정유(正裕)의 휘호를 받았으며, 아들인 효종이 명덕정순(明德貞順)의 휘호를 더 추상하였다.인조는 왕후의 장릉(長陵) 곁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만들어두었으며, 인조 승하 후에 효종이 그곳에 아버지를 봉릉하고 장사지냈다. 장릉은 원래 파주 운천리(雲川里)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묘 주위에 뱀과 전갈이 살기 시작하자 영조가 현재의 파주 갈현리로 이장하였다.

2. 성격 ¶

인열왕후는 성격이 인자롭고 때로는 엄격한 여자였다. 한씨는 현부인 시절에 살림이 어려워졌는데 인열왕후가 직접 자신의 재물을 모아 팔아서 살림을 꾸렸다고 한다. 왕비가 된 인열왕후는 남편 인조에게 항상 살생을 하지말고, 언제나 긴장의 경계를 풀지 말라고 조언을 하였는데, 이런 노력으로 인해 민심은 인조에게 향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조와 사이가 좋아서 5남 1녀를 낳았다고 한다.그리고 한씨는 중전으로서 가장 중요한 내명부를 엄하게 다스려 안정화 되었다. 또한 자식들에게도 엄격하게 대했다.



3. 인열왕후의 사후 ¶

그녀가 죽은 후에 바로 병자호란에서 패하고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게 된다.이후 인열왕후의 아들들인 소현세자,봉림대군,인평대군이 볼모로 끌려간다. 3년후에는 인조는 15세의 조창원의 딸(훗날 장렬왕후)과 혼인한다. 중전조씨가 어려서 주변 후궁들의 세력이 커지자 인열왕후가 바로 잡아 두었던 내명부의 기반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조선의 천하의 개쌍년인 소용 조씨가 소현세자와 강빈부부를 자주 모함하여 인조와 소현세자간의 관계를 악화하게 만들었다. 그로인해 소현세자가 의문사를 당하고 조씨가 강빈을 음해하여 사약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만약 인열왕후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끔찍한 비극은 아예 없었을 것이기에 그녀의 죽음은 더욱 안타까운 죽음이였다.

원주시 인동(仁洞)은 그녀의 출생지인데서 유래한 이름이며 인근 개운동에 인열왕후 탄생지비(誕生地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