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1. 배경
  2. 전개

2.1. 삼수채 전투

2.2. 완함령 전투

2.3. 통주성 전투

  1. 여파

2차 여요전쟁에서 고려군이 거란군에 크게 패한 전투.

1. 배경 ¶

강조의 정변이 일어난 후, 요성종이 이를 구실삼아 고려로 친정을 하게 된다. 이 때 동원된 병력의 수가 40만. 거란군은 1010년 11월 중순 압록강을 도하하여 흥화진을 먼저 공략하였으나 양규 휘하 고려군의 방어로 인해 함락시키지 못하게 되어, 무로대에 20만의 병력을 견제용으로 남겨둔 채 남하하였다. 남하한 거란군의 주력은 통주(현 선천군) 방면으로, 소규모 기동부대가 귀주(현 구성군) 방면으로 이동한다. 귀주 방면으로 남하한 소규모 기동대는 11월 18일 고려군과 충돌, 최사위 휘하 고려군을 패배시키나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

2. 전개 ¶

2.1. 삼수채 전투 ¶

통주에는 정변의 주역인 강조가 행영도통사로서 30만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1] 11월 25일, 강조는 병력의 대다수를 통주성 서남쪽 청강의 지류 3개가 합쳐지는 삼수채에 배치한다. 고려군은 병력을 3분하여, 강조의



본대는 하천이 모이는 합수목에, 나머지 2개 부대는 각각 통주성과 인근 산을 등진 형태로 진을 친다.

고려군의 배치는 정석적인 포진이었다. 전쟁과 역사의 저자인 임용한 박사도 오자병법을 인용하며 하천으로 보호받으면서 배후 기지를 둔 포진 방식이라 평했다. 물론 동절기여서 하천 자체가 흐르지는 않았으나 하천에 접한 언덕이 자연 방벽 역할을 해준다는 점을 활용할 수 있었다.

서전에서 고려군은 거란의 주력인 기병을 저지하기 위해 검차(劍車)를 전면에 배치, 거란군의 돌파를 막아내는 전과를 올린다. 이에 강조는 거란군을 얕잡아보고 지휘를 태만히 한다.

강조가 군대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아가서 물과 거리를 두고 진을 쳤는데, 하나는 통주 서쪽에 세 강물이 만나는 곳을 차지하고 진을 쳤는데 이곳에 강조가 머물렀고, 하나는 통주 근처 산에 진을 쳤으며, 하나는 통주성에 붙여서 진을 쳤다. 강조는 검차들로 진을 만들고 거란군이 쳐들어오면 검차들로 일제히 공격해서 모두 물리쳤다. 거란군이 번번이 물러가자, 강조는 적을 우습게보고 다른 사람과 탄기(彈?)을 했다.

兆引兵, 出通州城南, 分軍爲三, 隔水而陣:一, 營于州西據, 三水之會, 兆居其中 ; 一, 營于近州之山 ; 一, 附城而營。兆, 以劒車排陣, 契丹兵入, 則劒車合攻之, 無不?靡, 契丹兵屢却。兆, 遂有輕敵之, 心與人彈?。
『高麗史』 卷127 「列傳」40 ‘叛逆’1

이러는 동안 거란의 장수 야율분노와 야율적로가 삼수채의 본군을 기습한다. 기병의 치고 빠지기로 고려군의 진을 뒤흔들어 놓은 것. 보초병이 내습을 알리지만 강조는 "입안의 음식처럼 적군이 적으면 오히려 좋지 않으니 많이 들어오게놔두라."며 이를 일축, 결국 진을 돌파한 거란군에 의해 강조 본인이 생포되었다.[2] 더구나 이 강습돌파로 행영도통부사 이현운, 행영도통판관 노전, 감찰어사 노이, 양경, 이성좌 등이 생포되고, 행영도병마부사 노정, 사재승 서숭, 주부 노제 등이 전사하는 등 고려군의 수뇌부가 일거에 무너지면서 고려의 주력 야전군이 무너지게 된다. 대다수의 고려군들은 곽주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3만여 명의 피해를 보게 된다.[3]

2.2. 완함령 전투 ¶

곽주 방면으로 도주하던 고려군은 완함령까지 추격을 당한다. 이 때 완함령에는 좌우기군장군 김훈과 김계부, 이원, 신영한 등이 매복해 있다가 도주하는 고려군을 추격해온 거란군을 기습, 더 이상의 추격을 저지하여 병력을 보존하고 퇴각했다.

2.3. 통주성 전투 ¶

삼수채의 승전으로 기세를 탄 거란군은 곧바로 통주성을 공략한다. 공격 전 삼수채에서 생포된 문관 노전 등을 통주성으로 보내 항복을 종용하나, 통주성을 방어하던 중랑장 최질과 홍숙이 이들을 체포해 민심의 이반을 막았다. 방어사 이원귀, 부사 최탁 등과 성을 지켜내었고, 거란군은 12월 5일까지 2주 넘게 통주성을 공격했지만 통주를 점령하지 못하고 다시 남하하게 된다.

3. 여파 ¶

통주 전투의 패배로 고려의 야전군은 전력을 상실했고, 이어지는 곽주 전투에서 곽주성이 함락되고 서경 전투에서도 동북면의 병력을 가까스로 동원하여 수성하는 처지에 몰리게 된다. 결국 현종이 개경의 방어를 포기하고 나주까지 몽진하는 일을 겪게 된다.

한편 거란 측은 생포한 강조를 활용하여 고려의 내분을 유도하려 시도했으나 강조가 이를 거부하고 죽음을 당하여 전투의 승리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통주성 자체도 점령하지 못하여 남쪽의 곽주를 간신히 점령해 중간 기점으로 삼아야 했고, 결국 흥화진에서 거란군의 뒤를 밟아온 양규 장군이 곽주를 탈환함으로서 고려 영토 내에서 장기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어 개경을 일시 점령했음에도 전쟁 자체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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