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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50년경의 영향권.

匈奴

북방민족이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족속들이자, 천고마비라는 고사성어주인공들. 일설에는 훈족과 같은 민족으로 취급 받기도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Contents

  1. 개요
  2. 인종
  3. 언어
  4. 문명

4.1. 유물 사진

  1. 편제
  2. 풍습
  3. 전투
  4. 대외관계

8.1. 중국과의 관계

8.2. 한반도와의 관계

8.3. 그 밖에

  1. 역대 선우
  2. 흉노 소속 인물

10.1. 흉노 분열 이전



10.2. 남흉노 멸망 이후

  1. 관련 항목
  2. 인터넷상에서 사용되는 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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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상고시대부터 오호십육국시대까지 활동한 유목국가 . 끊임없이 중국과 치고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첫 등장은 기원전 4세기 말 전국시대 때부터이고 이후 (漢)대에 이르러서는 북아시아 최강의 유목국가로 성장한다.

사마천 사서 사기(역사책)에는 하나라의 후손으로 서주조져버린 털어버린 험윤과 훈육이 이들의 조상이라 하고 있지만, 사실 전국시대 이전의 북방 이민족들은 유목민이 아니라고 한다. 고고학적으로 제대로 된 유목문화는 기원전 10세기에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8~7세기가 되어야 비로소 중국 북방에 유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 초 사이에 등장하는 '호(胡)'라는 이름의 족속이 중국이 최초로 조우한 유목민이라고 보는 학설이 힘을 얻은 상태이다.

영토는 당시 중국의 3배에 달하는 큰 세력이었으며, 기원전 3세기 무렵 현재의 중국 북부에서부터 서쪽으로 코카서스 일대에까지 달하는 방대한 제국을 건설했고,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서부 만주, 그리고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내몽골(네이멍구 자치구), 간쑤 성, 동투르키스탄(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 달했다.

초기에는 한을 군사적으로 압도하면서 수도 장안까지 위협하였으나 점차 화친으로 돌아섰고 그 사이 추진력을 얻은 한무제의 강공으로 막북으로 밀려나 국력이 약화되었고 이후 5명의 선우가 난립하는 혼란기를 걸쳐 두 차례 국가가 분열되는등 패권직을 완전히 상실했다.

오호십육국시대서진(西晉)을 멸망시키고 화북지방에 유목왕조를 세우지만 문화적으로는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다가 선비족에게 된통 얻어맞고 점점 세력이 약화되더니 끝내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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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종 ¶

인종적으로 어떤 존재를 흉노라고 불렀는지 지금은 분명하지 않다. 그 근원을 먼 옛날 주나라 이전에 북방에 살았던 험윤(獫狁)이나 훈죽(熏粥)에서 찾는 사람도 있지만 이 부분은 연구가 부족해서 단정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나마도 춘추시대 초중반에 이들이 가축을 수입해 갔다는 기록이 있어 흉노가 아니거나 최소한 유목민으로서의 흉노는 아니라는 주장이 대세다.

흉노족과 훈족(Hun族)을 같은 민족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며, 흉노의 '匈'은 '훈(Hun)'[1]중국어음차로 부른 명칭이라는 설이 있다.일설에는 돌궐족이 이후 자신들을 흉노족의 후손이라 칭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튀르크족도 흉노족과 관계가 있다고 하며, 유명한 훈족의 경우 세력다툼에서 밀린 북흉노가 중앙아시아 유목민에게 동화되면서 그 집단이 유럽으로 일직선 전진한 거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이건 설의 단계. 그래서 터키와 흉노의 역사를 놓고 줄다리기 중이지만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현재로선 그저 미궁일 뿐이다. 대체적으로는 중앙아시아에 사는 튀르크족으로 추정.

그러나 정확하게는 흉노라는 말은 특정한 민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사마천은 《흉노전》에서 묵특에 의한 건국 초기의 일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서술한 바를 정리하자면 흉노는 국가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으며, 그 특징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십진법을 따른 군사, 정치, 사회조직을 관통하고 있다.
  2. 남쪽으로 좌, 중, 우로 된 3대 분할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군주를 중앙에 둔 좌우 양익체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 영민, 분지를 가진 24인의 만기들에 의한 연합 권력체이다. 여기에 보충 설명을 가하고 있는 이성의 비소왕들도 그들이 인솔하는 제족 집단을 포함하여 흉노국가는 다원, 다종족의 혼성적인 국가였다.

따라서 흉노는 민족이 아니라 국가명이며 흉노족이라는 명칭은 폐기되어야한다. 그래서 현재에 와서는 흉노는 민족명이 아니라 국가명으로 추측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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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언어

흉노 민족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만 있기 때문에, 현재 중국어로 음역된 일부 지명이나 이름들을 제외하고는 흉노어의 재구성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몽골어족이나 튀르크어족이 가장 유력하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그 외에도 예니세이어족이나 인도유럽어족 따위의 설이 난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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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명 ¶

흉노는 한나라나 진나라 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전국시대부터 이미 흥기하여 철기 시대에 진입했다. 중국에서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인 기원전 5세기부터 을 생산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서아시아로부터 전해온 것인지 또는 중국이 자체적으로 제철기술을 발전시켰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철의 발상지는 중국의 서쪽이며, 서남아시아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알려져 있고 그곳에서 기원전 3000년경부터 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서역의 앞선 철기 문명을 일찍 접한 흉노가 당시의 중국보다 일찍 철기 문명을 가질 수 있었고, 철제 무기를 이용해서 군사력 역시 강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실크로드 교역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앞선 서역의 문물을 중국에 전달 할 수 있었다. 흉노의 무덤에서는 다량의 철촉, 철검, 철제 마구등이 출토되고 있다.

철기 문화는 흉노의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한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에서는 흉노와 한나라 간에 교역이 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교역은 서로 교환할 물건이 확보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또한 흉노는 실크로드를 실질적으로 통제하여 무역권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는 흉노에게 큰 경제적 이익을 주었다. 서역에는 화려한 물품이 많다는 장건의 여행 보고를 읽은 한무제는 이를 탐내기도 했었다.

서한 초기 흉노의 위협에 직면해 이를 막아낼 수 없었던 한나라는 국력의 한계를 느끼고 흉노와 화친하여 무역하는 방법을 택했다. 한은 흉노의 침입을 막기에 급급했었다. 전국시대부터 쌓은 장성도 흉노로부터 한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무력으로 맞설 수 없던 한이 할 수 없이 택한 방식은 화친과 교역이었다. 한 무제가 흉노를 정벌하기 전까지, 흉노는 중국보다 상위에 있었으며, 무제의 정벌 이후에, 서역지배권을 빼앗긴 흉노는 실크로드 무역을 통하여 얻었던 경제적 이익을 상실하였지만, 흉노가 분열되고 나서부터 이 주도권 관계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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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유물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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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몽골 자치구내 전시된 흉노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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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발굴한 흉노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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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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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벨트 버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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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편제 ¶

사마천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흉노족의 우두머리를 선우(單于, 단우가 아니다)라 부르며, 선우 밑에 좌현왕, 우현왕, 좌곡려왕, 우곡려왕, 좌대장, 우대장, 좌대도위, 우대도위, 좌대당호, 우대당호, 좌골도후, 우골도후를 두었다. 이들은 크게는 1만 기, 작게는 수천기의 병사를 거느렸으며 그들을 둘러싸고 24인의 군단장이 있었는데 이들을 만기라고 불렀다. 군단장들은 천인대장, 백인대장, 십인대장, 비소왕, 상, 봉, 도위, 당호, 저거 등의 관리를 두었다.

태자는 좌도기왕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현명하다.', '어질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즉, 좌도기왕=좌현왕).

각 부족들은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그 안에서 이동하며 살았다. 좌우현왕과 곡려왕의 영역이 가장 컸다.

매년 정월과 5월에 군단장들이 선우에게 모여서 회합을 가지고 제사를 지냈다. 가을에는 대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백성과 가축의 수효를 점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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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풍습 ¶

북아시아의 미개척지대에서 목축을 하며 이동생활을 했다고 한다. , , 등을 주로 길렀고 개중에는 낙타, 나귀, 노새, 버새 의 진귀한 가축도 있었다.

농사는 짓지 않았으며 일정한 주거지가 없었다. 평화시에는 목축, 수렵으로 생계를 이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부족 전원이 전투에 임해 약탈에 나섰다고 기록된 것이 중국측 기록이나, 러시아 학자들에 의한 발굴에 의하면, 러시아 흉노 유적지에 농사와 축산과 일정한 주거지, 철기와 청동을 생산한 대장간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또 독특한 문양의 예술품도 있는 것이 밝혀졌다.

과거 중국측 기록이 이들을 일부러 야만스러운 오랑캐로 묘사한 것일 가능성이 높으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몽골의 경우와 같이 피지배계층이 농업과 공업을 하고, 지배계층은 목축과 수렵을 하는 체계를 수립한 경우인 가능성이 더 높다.

군주 이하 모든 백성들이 고기를 주식으로 했으며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고 한다. 건장한 자가 존중되었고 노약자는 천대되었다. 식사를 할 때 맛좋은 살코기는 장정들이 먹고 노인들은 남은 것을 먹었다.

아버지나 다른 식구가 먼저 죽을 경우, 그의 부인과 첩을 취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당연히 생모는 제외된다. 이와 비슷한 풍습으로 고구려에는 형사취수제라 하여 형이 죽으면 그 부인을 동생이 데리고 사는 풍습도 있었다. 이는 대부분의 유목민에게서 나타나는 제도이다. 토지를 소유하는 정주민족은 가장이 죽더라도 남은 유가족이 생활할 수 있지만, 유목민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딸렸던 식구들의 부양을 책임지워 노동력 감소를 방지하려는 사회적 의무이고 게르만을 포함한(카이사르도 신기하게 생각했다) 대부분의 유목민족들에게서 나타난다. 역시 유목민족야만인 느낌이 강했던 진(秦)나라에서도, 상앙의 변법이 있기 전까지 부자(父子), 형제가 처첩을 공유했다고 한다. 나중에 상앙이 자뻑드립할 때 언급된다. 유동성이 강한 현재의 중앙아시아 유목민족 에서도 형제의 처첩공유는 흔하다.

전시가 아닐 때 을 한 자 이상 뽑은 자는 사형에 처했다. 도둑질한 자는 재산을 몰수했다.

군주가 죽으면 측근 신하나 애첩이 순장당했는데 많을 경우 수백에서 수천을 넘기도 했다. 이외에 과 의복 등을 부장품으로 넣었으며 무덤에 봉분을 쌓지는 않았으며, 상복도 입지 않았다.

장례엔 죽은자를 애도하기 위해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어 죽은 자의 이마를 흘리는 이면이라는 풍습이 있었고 머리카락 일부를 베어 묻는 전발의 풍습이 있었다. 이 풍습은 순장을 억제하여 노동력 감소를 막기 위한 목적도 있다.

남아있는 기록이 중국측 기록뿐이어서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분야다. 다만 발굴된 흉노의 유적은 중국측 기록과 다른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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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투 ¶

을 잘 다루었는데 어린이들도 양을 타고 다니면서 작은 짐승들을 사냥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활을 당길 만한 힘을 가진 남성 전원이 기병으로 활약하였다. 접전시에는 칼과 짧은 을 사용했다고 한다. 한나라의 효경제 시절 한 군관이 수십기를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단 3기의 궁기병을 만나 병사를 모두 잃고 본인도 중상을 입은 일이 있다.

싸움에 있어서 후퇴를 불명예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싸움이 유리하면 무작정 전진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사정없이 도망쳤다.

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를 잡으면 상으로 한잔을 받았다. 노획품이나 포로는 그대로 당사자의 소유가 되었다. 전사자의 시신을 거두어 돌아온 자는 그의 재산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눈 앞의 이익을 위해 맹렬히 싸웠고 패색이 짙어지면 맹렬히 도망쳤다.

전쟁을 하거나 큰 일을 일으킬 때 의 모습을 보고 점을 치는 풍습이 있었다. 달이 차고 빛나면 좋은 징조이고 흐릿하면 나쁜 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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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외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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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중국과의 관계 ¶

산해경에 따르면 흉노는 의 마지막 왕인 이계의 자손이라고 하나,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게다가 산해경이라는 책 자체가 소설에 가까워서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이 못 된다. 아예 사마천은 산해경을 '감히 말할 수 없는 기서'라면서 깠지만, 문제는 정작 그런 사마천도 사기에서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夏后氏)의 후예(苗裔)라고 적어놓았다는 것. 하지만 이는 상술한 바처럼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비롯된 위사라는 견해가 강하다.

중국사에 흉노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인 설원(說苑)에 따르면 312년 누번의 영토에 거주하는 흉노가 급습해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만 이 정보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그 뒤로는 전국칠웅 중에서도 북방의 조(趙)나라를 꾸준히 괴롭히다가, 그만 이목의 기만책에 낚여서 처절하게 발려버린 기록이 있다. 이때 자그마치 10만이 죽고 선우는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고 하니, 이목도 이목이지만 10만이나 모여있던 흉노도 그저 ㅎㄷㄷ. 어쨌든 이 한 판으로 흉노의 조직은 거진 와해된 셈이다.

하지만 그러고도 남은 무리들은 서쪽 오르도스 지방[2]에 모여 살면서 진(秦)나라의 우환이 되었는데,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명을 받은 몽염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해 밀어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황하 밖으로 오르도스를 빙 둘러서 만리장성을 쌓아버렸다. 오르도스 확보와 만리장성 축조는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자원을 소모하여 결국 진의 멸망으로 이어졌지만, 흉노의 약화라는 목적만은 달성할 수 있었다.

시황제 아래에선 끽소리도 못하고 지내던 흉노였지만 초한전의 내전으로 중국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다시 남하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이룬것이 바로 그 유명한 묵돌선우.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건 유방나라를 세우고 나서부터이다.

한고조 유방은 기세좋게 토벌에 나섰지만 그야말로캐관광. 흉노는 유방의 조심성을 역으로 이용하여 유방의 보병을 유인한 뒤 기병 포위전략을 써서 유방을 떡발랐다. 진평의 계략으로 겨우 풀려났지만 결국 패배는 패배. 한은 흉노에게 한나라 여인을 선우의 아내로 바치고, 그 외 각종 물자와 인력을 보낸다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화약을 맺게 된다. 그나마 거란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을 때 송 쪽이 역할을 맡아 체면이라도 차렸는데, 이 화약의 경우엔 한나라 쪽이 동생이었다... 망했어요

나중엔 여후에게 묵돌 선우가 그대가 과부가 되었다고 들었소. 우리 서로 부족한 것을결합해 나와 혼인하는게 어떻겠소 같은 식의 무례한 편지를 보내도 토벌도 할 수 없었다.

그 뒤로 평소엔 평화유지비 받아먹고 먹을 거 떨어지면 국경을 두들겨대다가 복수의 칼날을 갈던 한무제에게 된통 걸려서 너죽고 나죽자로 싸우게 되었는데, 수십년간 지든 이기든 10만 이상씩 계속 초원으로 원정군을 보내는 쇼미더머니 소모전에 밀려 결국 선우정이 막북으로 쫓겨가게 된다. 그래도 능력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한의 총공세를 기적적으로 막아내 국가 자체는 지켜낼수있었지만 이러한 타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한무제의 손자인 선제 때에 이르어 국가는 동,서로 분열[3]되었고 동흉노는 한에게 칭신하고 서흉노는 강거로 가서 서역의 패권을 잡을려고 시도했지만 한의 토벌로 멸망하였고 잔존세력만이 남았지만 자세한것은 기록 부재.

단 이 한무제의 흉노 정벌은 전한의 재정에도 엄청난 타격을 주어, 가세가 흔들리게 되고 한무제 사후 재정난이 심화되어 소금과 철, 술의 전매로도 충당하지 못하는 사이, 관료들의 부패와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으로 인해 막장테크를 타게 되었다.

후한대에 이르어서 다시 선우직 문제로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졌다. 북흉노는 그후 여러번 국경을 침범하다가 후한 명제~화제반초의 서역 정벌과 화제 때 두헌(竇憲)의 북방 정벌 이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반초의 아들 반용(班勇)의 서역 정벌 때 다시 털리다 결국 155년경 선비족의 단석괴에 의해 멸망한다. 그 후 4세기 엄채국[4]을 함락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었다.[5]

이후 후한은 남흉노에 대한 회유정책을 펴 결국 관내로 집단이주시켜 군사적 용병으로 써먹게 된다. 그러다가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 중에 진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며 오호십육국시대 한(漢),[6] 전조(前趙), 북량(北凉), 하(夏) 등의 국가를 세우기도 한다.

10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중국 북부를 헤집고 다닌 관계로 중국 문화에는 흉노와 관련된 코드가 많다. 천고마비, 만리장성, 왕소군 등이 대표적이다.

관롱집단의 대명사로 유명한 수문제의 부인 독고씨는 흉노의 후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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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한반도와의 관계 ¶

좌현왕 이하의 장군들은 예맥, 고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 흉노의 왼팔이 잘렸다고 중국 사서에서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고조선 왕이 내린 작호 중 하나인 비왕(裨王)은 흉노족의 비소왕(裨小王)에서 따온 말로 추정된다. 아마 위만조선이 흉노와 연계하여 나라에 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서인 송서에 따르면 백제에는 좌현왕 여곤, 우현왕 여도가 나온다. 왕의 아우인 곤지와 문주를 가르킨다. 좌현왕은 흉노의 관직으로 병권과 왕의 후계자임을 나타내는 관직인데 백제도 이러하지 않았을 까 하고 추정하고 있다. 이들 두고 고구려에도 백제와 마찬가지로 흉노의 관직인 좌현왕, 우현왕이 있지 않았을 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하지만 자료 부족으로 알 수 없다.

신라 마립간 시대에 적석목곽분의 등장을 흉노계 유목민족이 신라를 정복해서 나타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환빠처럼 어처구니 없는 주장은 아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그대로 믿기 힘들다. 이와 별도로 신라 중대 이후 신라인들은 자신을 흉노 귀화인인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자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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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그 밖에 ¶

서역 국가들을 여러 차례 위협하면서 부세를 여러 번 거두기도 했으며, 서역 국가들의 싸움에 개입해 그 왕을 죽여 옹립할 정도로 강력해 말을 듣지 않으면 개입했다. 이 때문에 서역 국가들이 한나라와 흉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되었다.

터키에선 괵튀르크(돌귈)와 더불어 튀르크계 인종으로 자기들 조상 역사로 본다. 때문에 몽골이나 유라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꽤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지만 중국과 마찰이 심하여 중국과의 연계 연구는 그다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흉노의 귀족들은 연제(攣鞮), 혁련(赫連), 호한(呼韓) 등의 성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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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역대 선우 ¶

여기서 선우란 군주를 지칭한다. 황성은 '연제(攣鞮)'.

대수

왕호

재위기간

1대

두만

두만

? ~ BC 209

2대

묵돌

모돈 혹은 묵특

BC 209 ~BC 174

3대

노상

개죽 계죽

BC 174 ~ BC 161

4대

군신

군신

BC 161 ~ BC 126

5대

이치사

이치사

BC 126 ~ BC 114

6대

오유

오유 혹은 오유립

BC 114 ~ BC 105

7대

오사려

오사려, 첨사려, 아

BC 105 ~ BC 102

8대

구려호

구려호

BC 102 ~ BC 101

9대

저저후

저저후

BC 101 ~ BC 96

10대

호록고

호록고

BC 96 ~ BC 85

11대

호연제

호연제

BC 85 ~ BC 68

12대

허려권거

허려권거

BC 68 ~ BC 60

13대

악연구제

도기당

BC 60 ~ BC 58

14대

호한야

계후산

BC 58 ~ BC 31

15대

복주류

조도막고

BC 31 ~ BC 20

16대

수해

저미서

BC 20 ~ 12

17대

차아

저막차

BC 12 ~ 8

18대

오주류

낭지아사

BC 8 ~ 13

19대

오루

13 ~ 18

20대

호도이시도고

18 ~ 46

21대

오달제후

알려지지 않음

46

이후에는 남흉노와 북흉노로 분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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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흉노 소속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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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흉노 분열 이전 ¶

★는 한나라 → 흉노, ☆는 흉노 → 한나라로 투항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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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남흉노 멸망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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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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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인터넷상에서 사용되는 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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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는 일부 인간들이 경상도를 깔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유래는 흉노족 신라왕족설로, 제대로된 역사적 근거가 없는 설이다.[8]
다음 아고라에서 이를 인용하여 경상도 사람은 흉노인처럼 잔인하다느니 오랑캐다 하는 식으로 경상도 지역에 대한 혐오감을 표출한 것. 쉽게 생각하면 홍어드립의 경상도 버전.[9]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이라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다. 몇몇 사람들의 경우 단지 경상도 사람들이 왜 과민반응을 하냐고 발뺌하지만, 일단 특정 지역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을 드러내는 일은 비유든 뭐든 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사람을 김치라고 표현하면 기분 나쁜 것과 똑같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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